- 점거당한 집
- 저자: 최수진
- 출판사: 사계절
- 출간일: 2024년 8월 30일
- 분류(알라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국내도서 > 추천도서 > 국내 문학상 > 박지리문학상
- 양장본200쪽, 115*188mm, 315g, ISBN : 9791169812108
박재용의 노트
보이지 않는 전시와 점거당한 현실
2015년부터 후쿠시마 원전 “귀환곤란구역”에서 진행 중인 “Don’t Follow the Wind”를 아시나요? 아무도 볼 수 없는 전시입니다. 12명의 아티스트들이 전 주민들이 빌려준 집, 창고, 농장,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작품을 제작했지만, 관객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작가들은 완전 방호복을 착용하고 가이거 카운터 경보음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작업했습니다. 방호복은 방사능 먼지만 막아줄 뿐, 방사능은 몸을 관통하며 매 순간 피폭이 진행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예술”에서, 최수진의 『점거당한 집』이 상상하는 2031년 원전사고 이후의 한국이 떠올랐습니다. 소설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우리는 묻게 됩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예술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경험했거든요. 거의 모든 일이 그렇듯, ‘선례’가 있습니다.
카셀의 기적과 체르노빌의 은밀한 실험
1955년 전쟁 폐허 위에서 시작된 도큐멘타(documenta)는 “붕괴와 회복”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히틀러가 금지했던 모더니즘 예술을 복권시키며 “전쟁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하려 했죠. 그런데 체르노빌은 더욱 극단적인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2016년 Guido van Helten이라는 작가는 체르노빌의 5호 원자로 냉각탑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면서, 방사능 위험을 감수했지요. 이후 Alice Miceli의 방사능-필름 접촉 실험, 2021년 “Chernobyl Papers” (온라인) 전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체르노빌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예술 공간이 된 셈이에요.
베이루트의 부서진 무대가 NGO 공간이 되다.
2009년 레바논 내전의 흔적 위에 개관한 베이루트 아트 센터는 2020년 대폭발로 전시공간이 파괴되자 곧장 NGO 구호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예술공간이 재난 대응 공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죠. 어쩌면 이거야말로, 리크릿 티라바닛이 말한 “관계의 미학”의 극한 형태가 아닐까요?
- 윤석열 탄행 정국에서 로비를 내어준 어느 기업의 사례… 검색이 되지 않아 소개 못함.
- 업데이트: “2025년 1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시위가 이어지던 중, 일신빌딩 1층에 위치한 갤러리(미술관 전시공간)가 시위 참가자들에게 공간을 개방해 몸을 녹이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 갤러리는 평소 소장품 관리 등으로 철저히 관리되는 곳이지만, 당시 영하의 날씨와 폭설로 인해 시민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특별히 개방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갤러리 안에서 담요나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했으며, 건물 경비원은 작품 보호를 위해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예언적 리얼리즘: 방사능 속의 예술가들
“Don’t Follow the Wind” 참여 작가들이 “보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들을 수 없는” 방사능 속에서 작업했듯이, 『점거당한 집』의 예술가들도 보이지 않는 위험 속에서 활동합니다. 최수진이 그린 2031년 원전사고 이후의 한국은 픽션이라기보다 평행 현실에 가까워요.
소설 속 세 도시(광주, 용인, 경주)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백남준아트센터라는 실재하는 공공 문화공간들이 재난 이후 어떻게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실이죠. 후쿠시마의 “귀환곤란구역”에서 전 주민들이 자신의 집을 아티스트들에게 빌려주었듯이, 소설 속 공간들도 새로운 점거와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점거의 계보학: 68혁명에서 방사능 구역까지
“점거”라는 행위는 68혁명의 소르본부터 2011년 월가 점령, 그리고 Don’t Follow the Wind의 방사능 구역까지 계속 진화해왔습니다. 하지만 소설 『점거당한 집』에서 점거는 정치적 저항을 넘어 예술적 실천의 메타포로 작동하는 듯 보입니다.
리크릿 티라바닛이 갤러리에서 쌀을 끓여주며 “관계의 미학”을 실험했듯이, 소설 속 예술가들은 제도화된 공간을 점거하여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창출하려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아포리아가 드러나죠: 미술관을 점거하면서도 미술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모순, 제도에 대한 저항이 결국 그 제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딜레마 말이에요.
소설 자체의 형식적 점거: 장르 경계의 해체
최수진은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점거”합니다. 이메일, 기사, 각주, 인터뷰 등 다양한 담화 형식을 끌어들이며 소설의 경계를 확장하죠. 리뷰 중에 “뇌가 점거당했다”는 표현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니에요. 이 소설은 익숙한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길을 잃게 만들고, 꽤나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강요합니다.
우리가 “미술아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문학에서 재현하는 거죠. “이것도 소설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면서 말이에요.
소설 속에는 허구의 소설이 등장하고(『문 안에서』, 『금일의 경주』), 허구의 전시가 펼쳐지며, 허구의 미술관에서 실재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이 언급됩니다. 이런 메타픽션적 구조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진 동시대의 조건을 반영하는 거예요.
기록자-치유자-저항자라는 삼각형
『점거당한 집』의 예술가들은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기록자: 시위를 취재하는 기자, 폐허가 된 경주를 기록하는 소설가
치유자: 함께 모여 대화하고, 막걸리를 나누며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들
저항자: 공공공간을 점거하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이들
“제자리걸음이라도…”
소설의 마지막 질문, “제자리걸음이라도 걷고 있으니까 다행인 걸까요?”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입니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실천에서 의미를 찾는 것. 이는 “Don’t Follow the Wind”가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이유와 같아요.
송고은의 노트
미술관에서 먹고 마시고 자려는 일련의 시도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자기만의 미술관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혹은 자기만의 영화관을, 도서관을, 자기의 감각에 따라 전시된 예술과 현실을 만나게 할 어떤 접점을. – p.93
혹시 SF를 좋아하시나요? 사놓고 읽지 않는 길고 긴 제 도서목록에서 SF는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변적 과학이야기 자체보다 그것을 끊임 없이 엮어내려는 우리 인간의 모습에 더 큰 흥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읽지 않은 이야기들에 죄책감이 없습니다. 예술이야기는 어떨까요? 가끔은 예술 작품보다도 그 작품을 만드려는 작가의 공상이 더 흥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SF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허무맹랑합니다. 앞서 나눈 두 이야기가 하나의 책으로 그것도 꽤 가까운 미래와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 진다니 읽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옥 같은 SF의 고전은 아름답지만 역시나 저의 현실 감각과 너무 동떨어져 있달까요? SF는 어쨌거나 그런 감각과는 멀리 있는 것이지만, 종종 외국소설에서 등장하는 일상용품브랜드나 사사로운 사건들에 대한 각주를 읽지 않아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자연스러운 감각이요!
저자는 꽤 성실한 관객임에 틀림없습니다. 역시나 “VR 고글을 끼고 한 체험이나 작품을 배경 삼아 인생샷을 남기는 전시 말고요.” 같은 미술 애호가(a.k.a 미술꼰대)의 자세 또한 겸비한 것 같습니다. 광주/용인/경주편에 등장하는 미술관 중 저는 광주의 ACC와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두 공간 모두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큰 공간입니다. 중요하지만 인기가 많지는 않은 장소입니다. 이야기를 늘어놓기 적절한 온도와 여백을 가지고 있어서 저자는 그 곳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찬란, 딱새, 하마 그리고 남매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 사이 저자는 미술품에 촛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 너머를 보며 가장 적극적인 예술 경험을 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미술관에서 어떤 상상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미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엉뚱한 상상들을 이 소설을 매개로 나눠보면 어떨까요?
예술의 각자의 것이 되는 것.
질문들
토론 질문: 점거의 윤리학과 미학
- 접근 불가능한 예술의 의미 Don’t Follow the Wind처럼 방사능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는 예술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점거당한 집』에서 “점거”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관객이 필요한 걸까요?
- 재난 지대의 예술 윤리 후쿠시마나 체르노빌 같은 재난 지역에서 예술가들이 방사능 피폭 위험을 감수하며 작업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요? 이것이 “재난 관광”의 예술 버전은 아닐까요?
- 공공공간의 점거와 민주주의 소설 속 아시아문화전당 점거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제도와 저항의 변증법 미술관을 점거하면서도 미술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제도 밖의 “진짜” 예술이 가능할까요?
- 위험을 무릅쓰는 예술의 한계 “Don’t Follow the Wind”의 작가들처럼 신체적 위험을 감수하는 예술이 과연 필요한가요? 예술을 위해 어디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요?
- 예술의 “실천성”과 순수성 “예술에서 실천성이 드러났으면 했다”는 작가의 발언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예술이 사회적 실천과 결합할 때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 독자/관객의 책임 이 소설을 읽으며 “뇌가 점거당한” 경험을 하셨나요? 어려운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과 노력이 요구될까요?
- 재난과 예술가의 역할 재정의 코로나19, 기후위기, 탄핵 정국 등 현재 진행형 재난 상황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기록자, 치유자, 저항자 중 어떤 역할이 가장 시급할까요?
독서노트(들)
아마, 큰 틀에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모임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 본연의 가치인 예술을 추구하는 욕구에 왜 사회적인 영향(정치, 환경, 기타 등등)을 받아야 하며, 예술(또는 예술을 행하는 사람들)의 의지 또는 잘못과는 상관없이 위축되고 그들의 메세지, 목소리는 한 없이 작아지게 되는가?’로 정리하고자 한다.
– ㅂOO
우리는 미술관을 중립적이고 순수한 공간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소통하며 공공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비판적 공론장으로서의 미술관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특히 최근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서 발생한 도록 검열 사건은 이러한 사실이 현재진행형이라는걸 반증한다, 슬프게도.
…소설이라서 굉장히 반가워하며 책을 들었고, 무거운 이야기를 젊은 감각으로 이야기해내서 재미있게 읽었다. 마침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을 읽고 있어서, 공론장으로서의 미술관을 연관하여 내 나름 소설을 해석해보았다.
– OㄷO
아시아 문화전당을 한번 가봤다. 예쁜게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아시아 각지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무속적 맥락 즉, 가장 억울한 삶을 산 사람이 가장 영험한 신이 된다는 관점에서 이 곳은 만신전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각지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그들과 공감하고 연대한다고 한다. 이 전시가 탄압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뜨끔하게 하고 사람들을 공분하게 하여 저들이 인과응보를 받게 할 에너지가 모이나? 대신 기록하여 남겨줄께요 정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이런 전시를 관람한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그냥 내 아픔과 슬픔을 읇조리며 내 한을 풀어줄 신령을 찾아 헤매는 신력의 멀티플렉스 혹은 편집샵 아님 팝업스토어?
– OㅇO
점거당한 집의 세 공간, 광주, 용인, 경주는 단지 이야기의 무대가 아니라 국가적 트라우마와 문화적 기억이 응축된 사회적 심층이다. 이곳이 물리적으로 붕괴되거나 방치되는 것은 단지 구조물의 붕괴가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상징 체계, 기억의 지층, 정체성의 매개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서 ‘urbicide’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도시의 파괴는 곧 사회적 주체들의 삶의 조건과 관계망, 역사적 연대의 해체를 의미한다. 광주의 문화전당, 용인의 예술센터, 경주의 소설적 유령도시, 이들 모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다.
…예술은 여기서 공간의 대체물이 아닌, 공간 자체의 수행적 재현이 된다. 예술가 남매가 과거의 전시와 소설, 퍼포먼스를 엮으며 공간을 점거하고 기록하는 장면은, 공간이 담지하는 사회적 기억이 어떻게 예술을 통해 활성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공간 활용의 문제를 넘어, 예술이 공간을 통해 스스로를 매개하고, 사회적 실재를 다시 쓰는 장소적 언어임을 드러낸다.
– OㅇO
나에게 좀.. 어려운 작품이었다. 중간에 삽입된 글들이 왜 등장했는지 헷갈리기도 했고, 한번에 잘 읽히는 서사는 아니어서 몇번씩 앞 장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서 읽었다.. 그래도 책을 다 읽고나니, 박하니라는 인물이 자신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그것을 미술관이라는 공개된 장소에 전시했다는 설정이 여운이 남았다. 누군가 일기는 사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는 글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특히 그 공간 어딘가에 작가 본인이 실제로 숨어 관객과 소통하고자 했다는 방식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관객과 작가 사이의 경계를 흔들고자 하는 시도였을까 생각이 들었다. 창작과 전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어떤 작업은 처음부터 전시될 공간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완성된 작업을 뒤늦게 공간에 맞추며 타협해야 할 때도 있다.
– OHO
“재난 이후 예술의 역할”
2031년의 원전 사고는 일상을 넘어서 예술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작품 속 인물들은 예술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고, 연대를 통해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려고 한다.
여기서 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재난 이후 사회에서 공동체의 상처를 드러내고, 연대의 장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 OH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