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노트 / 에르메스 미술상 추천위원으로서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자, 전소정 작가의 개인전

2020년 5월 8일부터 7월 5일까지,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 작가인 전소정 작가의 개인전, [새로운 상점 Au Magasin de Nouveautés]가 개최됩니다. 전소정 작가의 미술상 수상은 지난 2018년 19일에 이뤄졌고, 작가는 미술상 수상을 통해 파리에서 4개월간 진행된 레지던시와 2020년 서울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죠.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2000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으로 시작해 2008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으로 명칭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에르메스 미술상은 국내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권위있는 미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년 간 여러 작가를 선정한 뒤 그 중 최고의 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 방식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매년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에서 유지되고 있지요), 최근 몇 년 간은 한 명의 수상 작가를 선정한 뒤 발표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순전히 관람객 입장에서만 보면 여러 작가들 가운데 누가 수상의 영예를 얻을 지 예측해보거나 의견을 교환하는 ‘재미’가 줄어든 것일 수 있지만, 그런 재미보다 중요한 건 미술상이 지향하는 가치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작가에게 필요한 지원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겠죠. (물론 여기에는 에르메스 코리아의 리더십 변화와 더불어 2017년을 기점으로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3층에 있던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지하 1층으로 축소 이전된 점 역시 영향이 있을 겁니다.)

참, 상의 영문 명칭이 “Hermes Misulsang”라는 점은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미술상의 추천 위원으로서

짧게 남기는 이 메모에서는 지난 2018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추천위원으로서 취한 몇 가지 액션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저 스스로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추천위원 위촉 연락을 받은 것은 2018년 1월 15일 저녁 7시 반 경이었습니다. 불과 몇 개월 단위로 많은 일들이 명멸하는 미술계의 상황에서, 2018년에 추천한 작가(들)의 전시가 2020년에 이뤄질 것임을 안내받는 것은 꽤나 기분이 상쾌한 일이었습니다.

추천과 선정 방식은 이렇습니다. 다수의 추천위원이 작가를 두 명 씩 추천하고, 추천된 작가들의 명단을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의 토의를 거쳐 1차로 작가를 선정한 뒤 인터뷰를 거쳐 최종 선정을 진행하는 겁니다.

다른 추천 위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기에, 저는 최대한 같은 세대의 작가들을 추천하고자 애썼습니다. 큐레이터로 짧지 않은 시간 일해왔음에도 함께 일하는 작가 동료들과의 친분이랄 것이 없는 방식으로 지내왔지만, 추천을 위한 첫 번째 고려사항은 사적 네트워크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습니다. 미술계는 애초에 그리 넓지 않을 뿐더러,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작가를 어떻게 추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어떤 작가의 작업에 대해 생각하고, 그를 ‘안다는’ 것에 사적 친분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요.)

첫 번째 작가 추천은 없던 일로

몇 개월의 고민 끝에, 총 4명의 작가를 추천했습니다. 정확히는, 개인으로 활동하는 작가 한 명과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뤄 활동하는 복수의 작가를 추천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여러 작가들에 대해 고민하고 저 나름의 스터디를 하는 사이, 제가 추천한 작가(들)을 다른 추천 위원(들)이 먼저 추천한 거죠. 누군지 모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작가(들)을 추천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기쁜 일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작업을 지지하는 작가가 다른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니까요.

두 번째 작가 추천

이제 두 번째 고민이 시작됩니다. 고민 끝에 추천한 작가들을 추천할 수 없다면, 누구를 추천해야 할 것인가? 당초 스터디를 했던 다른 여러 작가들 가운데 누구에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거의 2년이 다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니, 고민이 컸던 것에 비해 꽤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저는 다시금 추천 작가를 정한 뒤, 추천 작가가 또 겹칠 경우 제가 선정하여 아뜰리에 에르메스 측에 명단을 전달하는 여섯 명의 작가(팀)을 순서대로 선택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래 작가들을 다시 추천합니다.

OOO 작가 (OO년생)
OOO 작가 (OO년생)

두 작가가 다른 분들의 추천과 중복될 경우, 아래 작가들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우선순위대로 씁니다.)

OOO 작가
OOO 작가
OOO 작가
OOO 작가
OOO (OOO,OOO)

추천의 기준은 추천위원 초대 문서에서 말씀주신, ‘컨템퍼러리 아트의 발전에 대한 기여’, ‘ 앞으로의 활동’ 외에

되도록 여성일 것
되도록 시각 매체에 기반할 것
본인이 하고 있는 작업의 함의를 파악하고 있는가

등입니다.

두 번째 추천 리스트가 첫 번째 리스트와 달랐던 점은 보다 여성 작가에 힘을 싣고, 작가 스스로 제 작업이 놓인 위치에 대해 작가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2016년 말의 해시태그 운동과 이후 서양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을 거치며, 우리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17년 이후 저의 입장은 ‘(예술계 내에서 남성은) 되도록 차분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은 지금까지도 기울어져 있으니까요.) 결국 쓰이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추천 목록에서는 남성이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물론 제가 의식적으로 성비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두 번째 추천 목록에서 남성은 총 8명의 작가 가운데 3명, 37.5%에 해당합니다.

또한, 연속적 흐름이라기 보다는 단절의 연속에 가까운 한국의 미술계에서 제 작업이 어디쯤 서 있는지, 혹은 자신의 활동이 한국이라는 지역적 틀을 넘어 빠르게 동기화되고 있는 전 세계 미술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는 작가들을 되도록 추천의 우선순위에 놓고자 했습니다. 물론, 작가가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가 정말로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추천의 결과

두 번째 추천을 진행한 두 명의 작가 (그리고 만약을 위해 추가로 우선순위를 정해 추천한 여섯 작가) 모두 다행히 다른 추천 위원들의 추천과 중복되지 않았습니다. 미술상 주최 측에서 그 점을 확인한 뒤, 저는 심사위원들이 참조할 수 있도록 두 작가의 작업에 대한 아주 짧은 (A4 2/3 페이지 가량의) 작가론을 작성하여 전달했습니다. 한참 전의 일이지만, 두 작가가 누구인지는 이 글에서 언급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두 작가들은 제가 그들을 추천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두 작가 모두 각각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미술상에 추천받았다는 말씀을 주셔서, ‘사실 그 추천을 제가…’라고 나지막이 고백을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미술상의 존재 이유

(지금은 하고 있지 않은) 미술대학 학부 졸업반 학생들의 수업에서 미술 제도에 대해 논의할 때, ‘미술상’에 대해 질문을 받기도 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일말의 기대와 환상을 갖고 있다가 실망하기도 하는 부분은 ‘상금’ 그리고 물질적 혜택입니다. 어쩌면 현재 국내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예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이나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다고 하더라도, 작가에게 아주 큰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상금으로만 따지면, 국산 중형차 한 대를 사기도 어려운 정도의 금액입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맥아더 펠로우와 같은 큰 규모의 조건 없는 수상 프로그램을 보기를 기대하지만, 지금으로선 미술계에서 ‘상’이 주는 경제적 혜택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술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종종, 누군가는 미술상이 ‘쟁취해야 할 여러 단계’의 하나라고 여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여기 미술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모종의 위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미술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 나름의 버전으로 미술계를 간주하고 있기에, 미술계에 존재하는 상징적 가치의 위계란 마치 무한한 평행우주같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위계의 사다리 혹은 계단에 일련의 단계가 존재한다면, 미술상은 그 가운데 한 발걸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게다가, 특정한 미술상이나 레지던시 입주, 비엔날레 참여와 같은 일들이 ‘최종 목표’를 향해 단계별로 이어지는 일종의 ‘테크트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계속되는 (그러나 채울 수 없는) 인정 욕구에 잠식되어갈 것입니다.

미술상의 존재 이유는 ‘지금의 미술’에 대한 평가, (공로상이 아닌 경우는) 더 나아가 앞으로 이뤄낼 작업에 대한 지지와 지원일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지금의 미술’이란 종종 그 기준점과 결과물이 아주 빠르게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미술상이 그러한 시간의 무게로 인해 권위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상의 일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쩌면,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상은 매번 논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풍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 이 글은 두 번에 나눠 총 65분에 걸쳐 작성했습니다.
** 글을 쓰기 전 잠시 “미술상”을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잡지 [퍼블릭아트] 2014년 10월호에 실린 글인 듯. “[메타비평]김선영_인정받는 현대미술이 갖는힘!? 2014.10″(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