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취향! [나는 누구인가?] 뉴필로소퍼 제17호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누군가요?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정체화(identify)하고 있나요? (주로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MZ, 이대남, 586 등등… 온갖 손쉬운 명칭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려고 합니다.

잠시 [그런 세대는 없다](신진욱 저, 서울: 개마고원, 2022)를 소개하는 서평 기사의 일부를 빌어와 봅니다.

저자의 주장은 “불평등 시대에 세대는 더 계급 계층으로 갈라지고 있으며 그만큼 더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586은 기득권이다’ ‘MZ세대는 경쟁을 당연시한다’ ‘2030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다’라는 세대론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의 불평등 사회에서 모든 세대 내에 깊은 경제적 계층격차와 그에 따른 정신세계의 괴리가 발생했다”는 결론 내린다.

“정체성”을 키워드로 찾은 몇 개의 칼럼 및 기사의 내용도 공유해봅니다. 각 글의 작성 연도에 주목해서 한 번 읽어봐 주세요.

이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의 정동적 표현은 ‘억울함’이다. 우리 세계는 “말도 안 되는”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소비자라는 정체성,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우리 존재에 중첩된 많은 정체성 중 일부로서,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한정된 맥락과 상황을 벗어나 다른 정체성 영역을 침범할 때, 즉 ‘지배 정체성’으로 결합·확장했을 때 역기능이 나타난다. 과거 개발독재 시기에는 ‘국민’이라는 강요된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압도했다. 지금 그 자리를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이 꿰찬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학교의 비리를 공익 제보한 교사에게 그 학교 학부모들이 퍼붓는 격렬한 비난을 보라. “정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 행동이 아이들에게 피해가 된다.” “내 딸이 힘들어하니 나쁜 교사다.”

이를 탐욕과 이기심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은, 악다구니 쓰며 ‘피해자성’을 입증하지 않으면 아무도 누군가를 돌보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기도 한 까닭이다. 억압과 착취를 시정하라는 정치적 요구가 매번 좌절되고 묵살되기에, 그 반동으로 시장의 명령(소비자)과 도덕적·사법적 명령(피해자)이 끝없이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은 각자의 고통을 절대시하는 불행경쟁으로 귀결하고, 그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의 실질적 불평등은 ‘평평해져서’ 쉽게 은폐되고 만다. 평등의 과정으로서 정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다.

– 박권일, “[세상 읽기] 우리를 지배하는 정체성” (2016년 1월 14일, 한겨레 신문)

-소비사회가 가속화되면서 시민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된 듯합니다.

“그도 그런 것이 요즘엔 투표도 유권자보다 소비자 마인드로 해요. 그래서 저는 선거도 소비자마인드로 접근하면 앵글이 달라질 거라고 해요. 예전엔 학연, 지연, 성별, 나이 등 귀속적 속성으로 투표했다면 지금은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해요. 누가 내 생각과 취향을 더 잘 실현해줄지, 누가 집을 사게 해줄지… 소비자의 안목으로 따져서.”

-제대로 된 정치를 소비하고 싶은데, 네거티브 뉴스만 소비해야 하니 피로해지는 거죠. 여러 트렌드 중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노 사회예요. 과거 국민교육헌장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이라고 했어요. 회사의 사훈이 ‘사원을 가족같이’였죠. 지금은 ‘회사가 부자라고 내가 부자인가?’ 반문해요. 더 잘게 쪼개지고 파편화된 나노 사회에서, 개인은 집단에서 구하던 정체성을 나 스스로 구해야 해요. 제 각자 ‘자기다움’이 엄청난 과제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나다운 게 뭐야?’ 정체성을 요구받으면 순간 막막해져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납득하기 위한 노력으로 ‘MBTI’, 성격테스트에 열을 올렸어요. ‘나다움’의 증거가 되는 물건을 사고, ‘나다움’의 힌트를 주는 책을 읽고. 그렇게 스스로 ‘나다움’을 찾는 기나긴 오디세이가 시작된 겁니다.”

-저는 그 ‘나다움’의 증거 찾기가 결국 ‘일’로 모일 거라고 봤는데요.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이어질 거라고요. 아닌가요?

“일을 잘하면 월급도 오르고 승진도 하겠죠. 그런데 회사의 정체성이 이미 나의 정체성이 아니니까. 6시까지만 회사원의 정체성이고, 6시 이후는 다시 나를 찾는 시간이죠. 최근에는 일이 천직이나 소명의 틀을 벗어나서 형태적으로 다원화되고 있어요. 저도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지만 스마트스토어도 운영하고 기업 컨설팅도 하고, 유튜버도 하거든요

-다각도로 정체성의 총량이 늘어나는 셈이네요.

“행복연구의 대가인 최인철 교수가 그러더군요. “행복하려면 정체성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한 바구니에 담으면 깨지면 그만이잖아요. 예측불허가 일상화되니, 어느 날 내 정체성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확률도 높아졌죠. 결국 엔잡, 멀티 페르소나가 다 나노 사회로 연결돼 있어요.”

(중략)

-최근에는 SNS로 소비되는 정체성 시장이 더 커 보입니다.

“그렇죠. 요즘엔 꼬맹이도 자기 틱톡 계정이 있어요. ‘틱톡에서의 나, 페북에서의 나, 인스타그램에서의 나’가 다 다르죠. 틱톡은 재밌는 나, 페북은 똑똑한 나, 인스타는 잘 나가는 나… 심지어 반려동물 대리인으로서의 나도 있어요. 지식인, 살림꾼, 장난꾸러기 등등 어떤 앱을 꺼내 쓰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나와요.

(중략)

-정체성을 갖고 노는 이 상황이 실존적 자기 성찰에 더 좋을까요? 나쁠까요?

“좋고 나쁘고는 없어요. 팩트로 받아들이고 나는 무엇을 할까, 어떤 비즈니스를 할까를 생각해야죠.”

(후략)

– 김지수,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정체성 사회 가속화… ‘나다워야’ 살아남는다” 김난도” (2021년 12월 8일, 조선일보)

1. 그래서, 나는/우리는 누구일까요?

뉴필로소퍼 제17호 [나는 누구인가?] 19페이지에 언급된 ‘다중 정체성’ 개념으로 나/우리를 한 번 들여보아도 좋겠습니다.

  • 사회적 정체성
  • 전기적autobiographical 정체성
  • 생체 정체성

2.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내러티브를 원하는대로 남겨둘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우리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원치 않게 소환되는 일이 곧 벌어질 지 모릅니다. MIT 미디어랩에서는 “증강 영생(Augmented Eternity)” 플랫폼을 개발 중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디지털 휴먼으로 재탄생시켜 고인에게 궁금한 질문 따위를 묻을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성공한다면, 세상을 떠난 능력자들에게 복잡한 계산을 부탁한다던가, 인사이트를 구할 수도 있을 겁니다.

3. 나/우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소비자 / 피해자 / 혹은…?

발제 포스팅 첫 머리에 인용한 몇 개의 인용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요즘 우리 주변의 뒤숭숭한 일들을 생각해봅시다. 이번 달의 책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정체성은 실로 물렁물렁하고 (흐물흐물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양한데, 매일을 살기에도 벅찬 우리에게 주어진 건 몇 가지 안되는 정체성의 선택지 뿐인 것 같습니다. 근데 과연 정말 그럴까요?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고유의 정체성을 한 번 붙여볼까요?


독서 노트 함께 읽기
셰프 앤서니 부르댕(1956-2018)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유족의 동의 없이 당사자의 목소리를 AI로 재현해 본인이 쓰지 않은 글을 읽어 논란이 된 사건에 대한 CBS 보도.

“생존은 뭐고 죽음은 뭘까?”

보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가 슬픔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기위해 그 사람이 생전에사용하던 물건을 치운다. 디지털 대응물이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라면, 함께 공유했던 기억과 흔적을 치우는 애도의 과정은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 ㄱOO

“나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는 ‘새로운 나’는 ‘예전의 나’의 창조물인만큼 완전히 바뀌기는 어렵다고, 그러니 좌절말고(?) 가능한 만큼만 바꿔나가라고 한다. 묘하게 위안이 되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다. 고등학생때 이후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10년만에 만난다면, 그 친구는 뭐라고 할까? 아마 ‘너는 그렇게 살 줄 알았어.’ 하면서도 ‘너는 그때와 정말 많이 달라졌어’라고 할 것 같다.

이 잡지의 제목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는 과거의 내가 한 일을 책임지고 미래의 나를 준비하는 ‘현재의 나’라고.

– ㄱOO
“아시안 랩”은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인가?

‘정체성’ 이라고 이야기 하면, ‘변하지 않는것, 고유한 것’이라고 떠올리지만, 이 정체성은 가변적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사람인데, 책에서 언급한 ‘생체 정체성’ 외에 ‘사회적 정체성’, ‘전기적 정체성’은 많은 부분이 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하는 것에 따라 나를 형성하는 생각들은 변하기 마련이고, 이것이 나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에 정체성은 변한다.

– ㅂㅇㅇ

“데이터가 곧 당신은 아니다!”

74p 우리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데이터와 머신러닝에 점점 더 의존할수록 우리 자신을 알아갈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진다.

…온라인의 세계에서는 경험의 폭이 조금 더 좁아지는 느낌이 들고 “우연한 발견”을 하는 재미가 덜 한 것 같다.
처음 설정된 “내 데이터”가 “내자신”이 되는 듯 하다.

– ㄱOO

“개인의 철저한 변화는 가능하다. 깊은 변화는 … 미지의 세계로 선뜻 뛰어드는 행동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통제를 포기하려는 만큼만 변화한다. 우리는 어떠한 행동들을 추구하고 난 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절대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출항한 배이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항로는 조종하는 자의 마음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나를 어디로 이끌고 싶은가? 어디를 피하고 싶은가? 답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용기를 좀 얻고 싶다.

– ㄱOO

“나는 누구인가”

새로운 사람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이름과 나이, 직업, 사는 곳, 취미 그리고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출신 대학, 학과, 키우는 강아지 등을 소개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앞에서 소개한 하나하나가 합쳐진 게 ‘나’인가?. 저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그렇다면 저 요소들은 내가 삶의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좌표에 불과할 뿐 ‘나’를 설명하기 위한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소개하고 있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 Oㅈ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