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일어난 일, 너무 늦게 일어난 일

오늘(10월 14일)이 마지막 날인 아이치 트리엔날레 관람을 위해 왕복 항공편과 숙소를 끊어놓고선, 몇 가지 이유로 가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눈을 뜬 직후 아주 짧게 명상하며 떠오른 한 마디 말이었습니다.

“여기까지.”

8월에 몇 주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동료이자 친구였던 두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두어 달 간은 온갖 종류의 의식적,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안간힘을 써서 작동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방어기제는 주로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발현됐습니다. 특히 9월에는 한국에 머무른 날이 거의 며칠 되지 않았어요. 일주일 좀 넘게 러시아에 갔다가 돌아와선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며칠 하고 다시 미국에 가는 식. 마치 이코노미석 장거리 비행편의 불편한 좌석에 끼여 선잠을 자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같았죠.

한국에 돌아와선 바로 며칠간 광주에 다녀왔고, 곧 열흘 정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다녀올 계획을 진지하게 세웠습니다. 10월 말에 대만에 며칠 출장을 다녀오기로 한 일정은 확정. 스카이프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선 직접 들르겠다고 나섰습니다. 11월엔 또 열흘 가량 서울에 없을 듯 하고, 12월엔… (이후 생략).

무엇이 그렇게 괴로웠을까요. 얼마 전에 들른 박보나 작가의 전시 오프닝에선 알 수 없는 비애감에 사로잡혀 조용히 자리를 떴습니다. 벽면에 평면 스크린 두 개를 나란히 건 영상 작품을 보던 중이었지요. 하얀 배경의 공간에서 흑백으로 이뤄진 옷을 입고 신발을 벚은 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말 없이 모종의 손짓을 하는 퍼포머들. 바로 옆에 걸린 스크린에선 동일한 퍼포머들이 우주에 관해 대화하는 모습이 10여 분 간 재생되었습니다. 제게는 나란히 놓인 두 영상이 마치 모든 것의 통제할 수 없는 무상함을 선문답하는 것처럼 들리고 보였어요.

…어떤 일은 너무 빨리 일어났고, 또 어떤 일은 너무 늦게 일어났습니다. 너무 많은 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지금, 시작과 끝이 있고 기승전결이 있는 서사에 대한 갈증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것 같지만 – 우리의 삶이라는 무작위한 타임라인 위에 놓인 여러 사건 가운데 완결된 서사로 존재하는 건 아마 거의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의 이야기엔 대체로 멋들어진 도입부도, 퍼즐 조각을 맞추듯 착착 맞아 떨어지는 전개도, 대단원의 막을 깔끔히 내려주는 명확한 결말, 완결도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직접 쓰거나, 누군가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잘 편집해 시작과 끝을 부여해줄 수는 있겠지만요.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왠지 인과 관계를 가지고 앞뒤가 맞아야만 할 것 같이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죠. 그때 우리의 정신은 아무 말 없이 구멍의 속을 채워넣으려고 작업을 시작하나봅니다. 그 작업의 과정과 결과는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겠고, 비난할 대상을 찾는 식일 수도 있을 것이며, 무엇을 해서든 스스로를 가만두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나봅니다.

어제 새벽. 마음 한구석에 결코 가볍지 않은 돌처럼 지니고 다니던 일은 밀려있고, 몇 시간 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할 곳에는 태풍이 상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짧은 며칠간의 일정이지만 대충이라도 짐을 싸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눈 앞에 놓여있을 때 잠시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내쉬는 동안 가만히 떠오른 단어는 “여기까지” 였습니다. 그래요, 이쯤 되었으면, 우선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라고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보았습니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과 너무 늦게 일어난 일. 시간이라는 구조를 통해 생각하는 것 역시 불가해한 대상을 앞에 둔 채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빌려 세상을 파악하려는 안간힘일지 모릅니다.

다시 8월 중순으로 돌아가서 – 친구들에게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기 하루 전, 얇은 책자를 하나 샀습니다. 입니다. 1998년부터 시카고에서 활동 중인 Temporary Services의 멤버인 Marc Fisher가 2006년에 쓴, 일종의 매니페스토라고 할 수 있는 책자-글의 제목은 “Against Competition” (링크). 예술에서 동일한 아이디어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것에 좀 더 열린 태도를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하는 소고(小考)입니다. 좋은 내용에, 너무 길지 않은 분량이라 아주 적당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연히도, 책자를 받을 사람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내 안의 온갖 방어기제가 갖가지 모습으로 드러난 두어 달을 보내고 나서, 이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 지, 혹은 내 이야기를 쓰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렴풋이나마 마음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받을 사람이 사라져버린 “Against Competition” 책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는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니 직접 번역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요.

아주 우연히, 9월 말에 열린 뉴욕아트북페어에 차려진 Temporary Services 부스에서 글의 저자인 Marc Fisher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주 짧게 대화 속에 세상을 떠난 여러 동료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저 즐겁고 좋게만 떠나지 못한 이들과 이후에 일어난 일을 훨씬 더 많이 겪은 Marc는 제게 덕담 아닌 덕담을 들려주었죠. 우연한 만남이 있고 며칠이 지난 뒤에는 마침 시카고에 갈 일이 있어 그가 자주 들른다는 시카고의 어느 한인 슈퍼에서 다시 한 번 만나 많은 말 대신 몇 가지 단어와 침묵으로 생각을 교환했습니다.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산 얇은 책자와, 예상치 못한 슬픈 소식, 나름의 애도, 거기에 대한 뜻하지 않은 – 무척 고맙다는 편지를 받는데서부터 분노에 찬 전화를 받기까지 – 여러 반응과, 회피와 방어기제로 점철된 두 달 동안의 시간. 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쓰여진 이야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내러티브에서 나름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쓴 이야기는 내 삶 안에서만 앞뒤가 맞을 따름일 겁니다. 내가 써내려 가는 이야기 속에선 스쳐지나가는 인물에 불과한 누군가도 자기 삶의 이야기에선 주인공일테니까요. 때로는 어떤 식으로든 공적인 제스처를 취해서 내 이야기를 공적인public 것으로 만들려 애써본 들, 결국 돌아오는 건 그 이야기에 대한 타인의 무수한 해석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기승전결로 재구성할 마음이 없는 지난 60여 일간의 이야기는 우선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