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베를린 어느 서점에서 파는 에코백, 외국 어디서 열린 비엔날레 국가관에서 나눠준 가방을 든 한 무리 청장년이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재잘거린다. 30여 분 동안 진행된 퍼포먼스를 보고 몰려나온 미술 관객들이다.

그거 어땠어? 움직임이 좀 별로였던 것 같아. 이런 내용의 대화는 여기 이 미술 관객들이 주고받는 내용이 아니다. 어,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이에요. 지난 번에 거기서 봤죠? 음, 거기서 봤죠. 저는 누구라고 해요. 네, 알고 있어요. 지난 번에 거기서 그거 하셨죠? 뒤풀이 있다고 하던데, 어딘지 들으셨어요? 저쪽에 있는 거기에요. 그거 잘 하는 곳이래요. 같이 가시나요? 음, 저는 오늘은 일이 있어서요. 오, 누구씨 반가워요!*

무리 가운데는 좀 나이가 든 사람도 있고,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들린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가운데 윗 세대 사람이 없어서, 오늘 미술 관객들은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낮은 것 같다. 혹은, 12월 초의 추운 겨울 밤에 30여 분 동안 퍼포먼스를 즐기는 건 살짝 나이가 든 미술 관객들까지만 가능한 일인 건지도 모른다. 전시 오프닝에 맞춰 진행된 퍼포먼스인 만큼, 큐레이터는 행사에 꽤 공을 들였을 것이다.

평일 저녁 시간을 내어 전시 오프닝에 찾아온 이들은 대부분 미술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기획자, 평론가, 참여 작가와 그들의 동료 작가, 혹은 그들이 진행하는 학교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 즉 예비 작가 등등. 사람이 붐비는 오프닝에서 전시와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기란 쉽지 않지만, 대체로 제 작업에 바쁜 미술인의 입장에선 오프닝에서만큼 동료를 압축적으로 만날 기회가 드문 것 또한 사실이다.

놀랍게도, 어느 오프닝에서건 한 두 명 쯤은 아는 얼굴을 마주치게 마련이다. 오프닝에서 연달아 얼굴을 마주치며 안면을 익히는 경우도 있다. 저희 지난 주에 거기서 보지 않았나요? 그 작가분 저도 좀 알아요. 아, 저희 그때도 뵈었죠? 그 전시는 어땠어요? 우연한 대화를 통해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찾는 행운이 따른다면, 오프닝은 어렴풋하게나마 미술 세계의 친구를 만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전시 오프닝은 결국 미술계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준거집단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자리인 것 같다. 혹은 서로 평행하는 작은 준거집단이 동시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우주라는 사실을 깨닫게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는 전시에선 대체로 비슷한 사람을 마주치는 법이지만, 내가 갈 법하지 않은 전시에선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난 번의 우연한 마주침을 되짚으며 친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9년 12월

* 아마 오늘 저녁 본 전시나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는 뒷풀이 자리, 혹은 다음에 볼 전시의 다른 오프닝과 뒷풀이 자리에서 이어질 것이다.

** 이 글은 2019년 12월 3일 화요일 저녁, 보안여관에서 열린 [사이키델릭 네이처](기획: 송고은, 참여 작가: 니콜라스 펠처, 류성실, 양승원, 정희민, 최하늘) 전시 오프닝에 들른 직후, 인근의 카페에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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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키델릭 네이처_Psychedelic Nature> ㅡ 🔸일시 : 2019. 12. 3 – 2019. 12. 31 🔸장소 : 통의동 보안여관 BOAN1942 🔸참여 작가 : 니콜라스 펠처, 류성실, 양승원, 정희민, 최하늘 🔸기획 : 송고은 🔸협력 기획 : 김유란 🔸그래픽 디자인 : 오퍼센트 ㅡ 자연은 늘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자연과 새로운 접속을 일으킨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환영은 오늘날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사이키델릭 네이처>(Psychedelic Nature)는 인공 낙원의 혼종적(hybrid) 자연를 지칭하는 Psychedelic을 다룬다. 니콜라스 펠처(Nicolas Pelzer), 류성실, 양승원, 정희민, 최하늘이 포착한 뒤틀린, 떠도는, 도래하는 자연의 풍경과 함께 자연의 ‘신성’마저 복제하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업체eobchae(김나희, 오천석, 황휘)의 영상 퍼포먼스는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적 역사를 들춘다. ㅡ 🔹오프닝 : 2019. 12. 3. 화요일. 오후 7시 보안클럽(신관 지하 2층) 🔹퍼포먼스 (업체eobchae) :2019. 12. 3. 화요일. 오후 7시 30분 보안클럽(신관 지하 2층) ㅡ 전시 연계 프로그램 : 🔹2019. 12. 6. 금요일_7시 30분 보안책방X자연과 환각의 아카이브_보안클럽 🔹2019. 12. 8. 일요일_2시 참여 아티스트+송고은_보안클럽 5시 업체+김아영(시각예술가)_보안클럽 #통의동보안여관 #보안여관 #사이키델릭네이처 #Psychedelic #Nature #송고은 #니콜라스펠처 #류성실 #양승원 #정희민 #최하늘 #업체eobchae #오퍼센트 #아트스페이스보안 #BOAN1942 #artspacebo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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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Snowshoe tracks meander through the snow-covered meadows of Paradise. NPS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