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roup of elegant men smoking cigars

미술아냥, [또 다른 현대미술]

고은의 노트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과연 내가 저자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란 질문이 듭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유럽 중심의 시각, 그것도 프랑스 민족주의적 정체성에 깊이 물든 백인 남성 미술애호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숨기지 않습니다. 미술의 ‘원형’을 프랑스 민족화에서 찾는 그의 태도는, 오늘날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하려는 미술계의 흐름과는 분명하게 어긋나 보였습니다. 그가 진정한 미술의 계승자로 거론하는 가장 젊은 작가들이라야 발튀스나 샤프란 정도니까요. 미국 중심의 예술사에서 ‘또  다른 현대미술’을 찾다가 오히려 유럽 전통의 미학적 기준에 협소하고 배타적인 또 다른 벽을 만난것 처럼 느껴졌습니다.책을 넘기며 매우 일방적이고 이상한 배신감 마저 듭니다. 

저는 결국 다시 뒤샹을 떠올렸습니다. 저자가 비판한 대로 ‘실패한 예술가’였을지 몰라도, 그가 했던 시도는 얼마나 혁명적이고 용감했던가. 일상의 오브제를 미술관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그의 행위는, 비록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예술을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끄럽고 방만한 현대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의 일방적인 비판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미술사가 완벽히 정직하고 합리적이라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미술사’에 속아온 것이 아니라, 애초에 미술이라는 세계가 언제나 권력과 자본, 제도와 문화적 편견 속에서 기록되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정말 잘못된 미술사에 속고 있는 것일까요?        

재용의 노트

  • 아래 노트는 박재용이 쓰고, LLM 기반의 검색 도구를 통해 추가 자료 조사 및 팩트체크, 검증한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2020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30세 철학 교사 뱅자맹 올리벤느의 『또 다른 현대미술: 진짜 예술가와 가짜 가치들』. (찾아보니, 흥미롭게도 이 책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어로만 번역되었습니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 다른 언어 번역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프랑스 내에서의 제한적 반향? 한국 출판계의 특수한 관심? 아니면 우연한 타이밍의 일치? 사실 이 부분은 번역자 소개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나서, 무엇보다 저자의 출신 성분(?)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올리벤느의 이력은 프랑스 지식인 엘리트 코스의 전형입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철학과를 졸업하고 교수자격(agrégation)을 취득한 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이브 본푸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교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는 사회지도층이 선택하는 전통적이고 존경받는 진로입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철학 시험은 전 국민적 관심사입니다. 매년 6월, 고3 학생들이 4시간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 에세이로 답하는 이 시험은 프랑스 공영방송에서 생중계되고, 시험 문제는 저녁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합니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들은 바로 이 시험을 통해 프랑스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하거든요.

더욱이 ENS 출신에 교수자격(agrégation)까지 취득한 철학 교사는 “professeur de philosophie”라는 존경받는 호칭으로 불립니다. 사르트르, 시몬 베유, 알튀세르, 미셸 세르 등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거장들이 모두 이 길을 거쳤죠.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라 프랑스 지적 전통의 계승자이자 미래 엘리트를 양성하는 “사상의 파수꾼”으로 여겨진달까요.

올리벤느의 경우 ENS → 교수자격 → 컬럼비아 박사 → 파리 고등학교 교사라는 코스는 “지적 엘리트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면서도 향후 대학 교수직이나 정치권 진출을 노리는 전략적 선택” 같아 보입니다. 검색해보니, 실제로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이 철학 교사 출신이라고 해요. 놀랍죠?

그의 박사논문 주제도 흥미로운데요. 이브 본푸아(1923-2016)는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이자 아방가르드에 저항했습니다. 본푸아는 현대미술의 개념주의와 추상화에 맞서 “현존(présence)”과 “장소성(lieu)”의 시학을 옹호했죠. 올리벤느가 본푸아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가 보여주는 반현대적 미학관의 학문적 뿌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어요. 올리벤느는 자신이 비판하는 바로 그 “엘리트”거든요. 아버지는 Canal+, Lagardère, Libération 같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경영진이었던 드니 올리벤느. ENS 출신에 컬럼비아 박사까지. 그런데 그는 자신을 “비전문가 일반인”의 관점에서 현대미술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포지셔닝합니다. 한국으로 치환해보면… 거대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기득권의 위선을 비판하는 포지션을 취해서 이목을 끄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랄까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올리벤느가 “일반인의 상식”을 대변한다며 현대미술을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그는 프랑스 사회에서 “상식”을 정의하고 형성하는 바로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올리벤느의 사상적 바탕

올리벤느의 논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조사를 해보니, 그에겐 사상적 ‘조상님’들이 있습니다.

첫째, 1990년 뤽 페리의 『호모 에스테티쿠스』입니다. 페리는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 어떻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과 화해할 수 있는가?”라는 미학의 근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책은 1990년대 프랑스에서 “철학의 대중화” 붐을 이끌었고, 복잡한 미학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올리벤느의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미술 비판” 방법론은 여기서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둘째, 1983년 장 클레르의 『미술 상태에 대한 고찰: 근대성 비판』입니다. 클레르는 1960-70년대 현대미술 현장의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발적 전향”을 통해 아방가르드 미술을 정면 비판했습니다.

1980년대 프랑스는 좌파 정권(미테랑) 하에서 문화정책의 대대적 확장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우파적 반발의 문화적 표현으로 클레르의 입장이 부상했습니다. 클레르의 논리는 “전통적 미의 가치”를 옹호하며 부르주아 계층의 문화적 노스탤지어를 대변했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소수 의견”에 머물렀습니다. (뭔가… 한국의 상황이 겹치는 것 같기도 하죠!?)

올리벤느는 이 두 전통을 2020년의 맥락에서 재조합한 것입니다. 프랑스 학술지 『Marges』가 “장 클레르의 1983년 논리를 거의 그대로 베낀 수준”이라고 비판한 것도 그래서 아닐까 합니다.

2020년 프랑스: 완벽한 타이밍의 우연

그런데 올리벤느의 책은 왜 2020년에 성공했을까요?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의 특수한 맥락이 있었습니다.

먼저, 질레 존 시위와 “접촉 없는 엘리트” 비판의 여파가 있었습니다. 2018년 11월부터 시작된 질레 존(Gilets Jaunes, 노란 조끼) 시위는 2020년까지도 프랑스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고 합니다. 마크롱은 “부자들의 대통령(président des riches)”이라는 낙인과 함께 “접촉 없는 엘리트(élites hors-sol)” 이미지가 고착화되었죠.

  • “길 건너편으로 가면 일자리가 있다”는 식의 계급 멸시적 발언들
  • 복지 지출을 “미친 돈(argent fou)”이라고 표현
  • 52주 연속 시위를 통해 파리 중심 기득권층과 주변부 노동계층 간 깊은 격차 노출

코로나19 문화 예산 논란도 마침 그때였습니다.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의 문화 부문 지원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총 50억 유로 문화 지원책: 29억(정부 직접 지원) + 1.2억(긴급 지원) + 10억(2021년 예산 증액) + 9.5억(“공백의 해” – 비정규직 실업급여 연장)
  •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엘리트 문화”에 대한 대규모 지원이 특권층 편향 정책으로 인식되었음
  • 특히 현대미술 분야 지원이 “일반인과 동떨어진 예술”에 대한 특혜로 비판받음

올리벤느 현상은 그래서 “완벽한 타이밍”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또 다른 현대미술』을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 반엘리트 정서의 문화적 출구: 정치적으로는 질레 존, 문화적으로는 “현대미술 비판”
  •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배제감의 결합: “이해할 수 없는 현대미술 = 서민 배제하는 엘리트 문화”
  • “상식의 복원” 담론: 복잡한 이론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옹호
프랑스 내부 반응

프랑스 학계의 신랄한 비판

  • 『Marges』 학술지(2021): “학문적 깊이 없는 철학적 허영”, “30세에 고백록을 쓰는 시기상조함”
  • OpenEdition 플랫폼: “bavardage mondain et billet de blog(사교계 수다와 블로그 포스팅 수준)”, “장 클레르의 1983년 논리를 거의 그대로 베낀 수준”
  • 철학적 개념의 피상적 사용: “감성, 자연, 진정성, 미메시스” 등을 정의 없이 남발
함께 생각해볼 것들

올리벤느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 예술의 “어려움”에 대해: 현대미술이 정말로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어려움은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제도적·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가요?
  •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에서: 예술의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올리벤느처럼 “카드 엽서 판매량”으로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대안일까요?
  • 엘리트주의 비판의 함정: 문화적 엘리트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반지성주의로 흘러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올리벤느가 “진짜 예술”로 추천하는 작가들: 발튀스, 자코메티부터 아리카, 메이슨, 자프란까지. 그의 선택 기준은 무엇이고, 과연 일관성이 있을까요?

“미술아냥”의 관점에서 보면, 올리벤느는 아주 흥미로운 케이스입니다. 그는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불편함과 거리감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바로 그가 비판하는 “엘리트” 시스템의 산물이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올리벤느의 비판에서 경청할 부분과 경계해야 할 부분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접근 장벽과 소통의 문제는 분명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그 해결책이 과거로의 퇴행이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올리벤느의 논리 중 어떤 부분에 공감하고, 어떤 부분에 의문을 가지시나요? “진짜 예술”과 “가짜 가치”를 구분한다는 그의 접근법이 과연 유효할까요? 그리고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궁금합니다. 프랑스와는 다른 우리만의 맥락이 있을 테니까요.

질문들

  • 지난 아트위크에서 발견한 긍정할수 있는/없는 미술은 무엇이 있으셨나요? 
  • 뱅자맹 올리벤느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시나요?
  • 이런 시각, 한국에서 각광받게 될까요?

발제 노트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어 이 책에서도 뒤샹의 샘은 현대 미술 비판의 상징이 되고있다. 어쩌면 현대 미술을 비판하고자했던 뒤샹의 의도가 시대를 관통하여 먹힌 것 같다. 난 뒤샹뿐만 아니라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현대 미술의 개념주의와 혁신성에 업혀서 명성과 부를 쌓고자했다기보다는 “이래도 예술로 볼거야?”를 묻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 ㄱOㄹ

뱅자맹 올리벤느는 책 “또 다른 현대미술”에서 책 제목처럼 ‘또 다른 미술사’, 공식적인 미술사가 아닌 진정한 미술사를 구성하는 예술가들, 현대를 살면서도 일반적인 현대미술에 종사하지 않는 예술가들, 특별히 프랑스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Jean Clair라는 프랑스 미술사학자의 책은 전부 읽을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도(p.157)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1920~30년대 이후 태어난 프랑스 예술가들을 크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p.7). 저자의 애국심 때문인지, 어떤 다른 동기에서인지는 몰라도, 저자는 이 프랑스 예술가들을 ‘민족 화파’라고 지칭한다. 저자는 이 논지를 펼치기 위해 18세기 이전 프랑스 회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부터 19세기 중반 그 개념이 탄생한 역사를 읊고, 그 이후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화가들도 ‘프랑스 회화’ 개념을 인지하고 심지어 사랑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아직 프랑스 민족적인 예술이 어떤 것인지 직관적으로는 딱 이해가 잘 되지는 않는다.

– ㄱOO (놀러가기)

그림도 시대를 잘 타면 유명세를 떨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또한, 자본주의에 의해 예술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에 잘 이해를 하고 활용을 하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한다.

돈이 움직이는 방향이 당시의 흐름이고 트렌드이기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같이 토론을 하면 좋을 것 같다. 

– ㅇㄱO

읽고 나니 이 책은 프랑스 미술계 내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란 생각을 했다. 민족주의 적이란 비난을 받지 않으려 피카소등 프랑스 파리 활동경력을 가진 작가들이 충분히 자국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하지만 프랑스적인 필터를 거친 거라고 말한다.

… 결정적으로 이 책이 회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기존의 전통을 뒤집어야 겠다는 개념미술의 주장이 그동안의 수많은 실험에 의해 이제는 진부해져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배신자로 여겨진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사진의 발명으로 생긴 문제의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수들이 알아본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겼다. 그냥 고수들곁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자신의 실력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ㅇOO

로티:“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우리는 ‘진짜 예술’의 본질을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술을 새로운 언어와 연대의 장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미국이든 프랑스든, 한국이든,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더 넓게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가 하는 점입니다.”

– 최도하 (파트너)

예술의 의미는 고전적 재현이나 전통적 기준에 갇힐 수 없다. 오늘날 대중이 열광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장식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감수성과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예술은 비록 소비적이고 즉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시대적 맥락을 탐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술의 의미가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왜 특정 작품에 공감하고 사랑하는지 질문하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에 필요한 예술의 자세가 아닐까.

– ㅇㅈ

신화가 되어버린 예술가는 자본과 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라 생각한다.

다수의 예술가들은 오직 그들의 창작을 향한 열정과 끈기있는 태도로 정진했을 뿐 그 어떤 타이틀도 영광도 바란적 없을 터이다. 자본과 기관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우리는 주목받는 몇몇의 작가들을 접하게 되고 방심하는 사이 그들이 예술의 이정표이자 나아갈 방향인것 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권력이 탄생한다.그것은 결코 예술의 전부가 아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지지 못했을 뿐인 뛰어난 많은 예술가들이 미술사 글자 사이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는 걸 명심해야한다.

– DH

올리벤느의 글 곳곳에서 드러나는 프랑스 부르주아 지식인 특유의 시대착오적 아비투스는 나에게 일종의 PTSD를 불러왔다. 예술과 제도적 인스티튜션의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그의 선언은 사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오만한 어조로 강조하는 태도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편한 목소리 또한 미술 담론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 ㅇㅇ

이 작가도 자국의 미술에 대한 애정과 프라이드를 바탕으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신의 가치관을 애매하게 돌려말하지 않고 확실하게 보여줘서 좋았다. 주장에 대한 근거 또한 불친절하거나 일방적이지 않고 나름대로 성실히 근거를 부여하고자 한 노력이 느껴졌다.

– HJ

나는 현대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나 ‘기술’에 집착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예술 작품이 아닌 다른 인공물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움이나 기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왜 예술 작품에 아름다움을 찾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름다움과 기예는 예술작품이 아닌 공예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아름답기만 한 예술작품은 현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지 않을까?

– 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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