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betaHUD(기예림, 한지형)의 [GNOME]

* 방문 후 3시간이 지나기 전, 무엇이든 남겨보고자 만든 “3시간이 지나기 전에” 카테고리에 속한 글.


방문일시: 2023년 4월 23일 일요일 오후 4시 51분 – 5시 40분
장소: 서울 마포구 방울내로 59 3층 “얼터사이드”
작성 소요 시간: 45분


한지형과 기예림. 두 작가가 소통하는 방식은 사람이 아닌 존재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전시에서 만나는 gnome(놈)은 아이러니한 존재다. 케임브리지 사전에 따르면, ‘놈’은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다. “A person who works by using their mind, but does not talk to, and is not known by, the public(사고를 써서 일하지만 대중과 대화하지 않고,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 그러니 불특정 다수에게 무언가를 선보이는 전시의 형식으로 ‘놈’을 가져와 보이는 행위 또한 아이러니다. 혹은, 이러한 전시의 행위는 그러한 아이러니 혹은 모순을 감수할 만하다는 판단에 기반한 일종의 선언일 것이다.

영상과 설치, 사운드, 회화를 통해 보이는 ‘놈’의 정체는 모호하다. 그런데 일견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은 기예림과 한지형 두 사람이 결합된 자전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질문이 직관적으로 떠오른다. 두 사람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두 사람이 공적으로 보여지는 SNS상의 모습, 두 사람 각각의 작업이 다루는 대상, 형식 모두를 감안할 때) 철저하게 피상적이다. 두 사람이 이런 피상성을 즐기는 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 개인으로서의 모습과 작가로서의 창작물이 여러 겹으로 매개되어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취하는 행동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해 본다.

일종의 은둔자라고 할 수 있는 ‘놈’을 전시로 끌어와 보이는 이 역설적인 행위는, 겹겹의 필터를 두르고 있는 두 사람, 두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는 건 아닐까라고 역시나 추측해 본다. ‘선언’이라는 비장한 단어에 지레 겁먹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SNS에 업로드 되어 우리의 스크린 타임을 앗아가는 수 많은 ‘콘텐츠’는 모두 어떤 면에서 ‘선언’에 다름 아니니까. 그저 그것이 갖추고 있는 형식적 틀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제 누구나 전 세계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충분한 관심을 받게 될 지,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불특정 다수의 피드에 노출될 지는 별개의 문제다.

전시 <GNOME>은 성운(星雲)처럼 엮여 있는 두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전시다. 하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게 그리 만만찮은 일이 아니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생각 해보라. 우리의 머릿속은 그렇게 깔끔한 기승전결 구조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2000년에 개봉한 SF 심리 스릴러 <The Cell>을 생각해 보라.) 세상 모든 일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명쾌하게 설명되는 건 음모론자의 머릿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세계는 이성과 비이성 따위의 이분법으로 이뤄져 있고, 따라서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선 의도적으로라도 비이성적 요소를 도입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주 자체가 그 근원에는 혼돈(chaos)를 깔고 있다. 이분법이 아닌, 그 너머의 무엇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놈’은 무엇인가. 형태적으로 그것은 귀여운 고깔 모자를 쓴 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놈’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스위스의 마법사-의학자-화학자인 Paracelsus(파라켈수스, c.1493-1541)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쓴 책 <A Book on Nymphs, Sylphs, Pygmies, and Salamanders, and on the Other Spirits>(사후인 1516년에 출간됨)에 처음 등장하는 이 단어는 그리스어 γη-νομος에서 유래한 듯 한데, 직역하면 earth-dweller, 즉 대지에-사는-자라 할 수 있다. 대지에-사는-자들은 또한 여러 중세 및 고대 신화에 등장한다. 이들은 주로 땅 밑의 광산 등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광산의 보물 따위를 지키는 존재인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형태의 ‘놈’은 19세기에 발명되었다. 조각가 필립 그리벨(Phillip Griebel)이 처음 만든 이 형상은 ‘가든 놈’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유럽 전역에서 소비되어 그리벨에게 부를 안겨 주었다. 이 도상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에서는 일곱 난장이의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스머프> 역시 프랑스어 원제는 <Les Schtroumpfs>인데, 네덜란드어 “schtroumpf”가 “gnome”을 뜻하니 결국 “파란 놈”인 셈이다.

단 한 사람도 오지 않더라도 지극히 공적인 형태로 창작물을 선보이는 ‘전시’로 보여진 이 ‘놈’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해 볼 수 있을까. 한지형과 기예림의 결합체인 99betaHUD의 ‘놈 선언’이 더 과감한 (심지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길 바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최신의 수단과 민감성, 사유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동시에 마치 ‘놈’들이 땅 밑으로 숨어 들어가듯 매개의 겹 뒤로 숨어버리는 두 작가가 이를테면 가장 ‘원시적’인 도구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식의 선택을. (전시장의 영상 작품(들)을 보면서, 이를 렌더링하는 데 들어간 컴퓨팅 파워의 소모량이 얼마나 될 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두 눈을 감고 전혀 다른 감각 만으로 감상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작업들로 전시를 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은 전시를 보고서 곧장 근처 카페에 앉아 생각나는 바를 활자로 옮겨보는 지금 이 순간의 내 생각일 뿐이다. ‘놈’이라는 도상 혹은 형상이 기예림, 한지형이 하나 된 99betaHUD의 시각 언어에서 어떻게 자라날 지, 해체되거나 용해될 지는 지금의 짧은 감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GNOME>은 서울시 마포구의 전시장 얼터사이드에서 2023년 3월 24일부터 4월 23일까지 한 달 동안 열렸다. 이 글은 전시 마지막 날 약 한 시간 가량 전시장을 방문하고, 우연히 만난 한지형 작가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성된 것이다.



한편, 누하동 153의 공간 NHRB에서도 이젠 미술 전시를 호스트하고픈 마음이 든다. 벽이 둥글고 천장이 높은 그 공간에. https://www.instagram.com/p/Cbq_SISpqH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