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의 노트
- 비엔날레 가보신적 있으신가요?
비엔날레 가보신적 있으신가요? 우리는 종종 이걸 “미술계의 올림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참여하고, 현재 가장 높은 예술성과 실험성을 지닌 작품을 소개하는 장입니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비엔날레를 개최해왔지만, 지금 이 제도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평가 받기도 합니다. 새로운 예술 담론을 생산하기보다 자본과 제도, 관광의 논리에 포섭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비평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구조들이 조금씩 어긋나 있듯이 “비엔날레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물음을 한켠에 두고 여전히 이는 미술계의 가장 큰 축제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 《강령: 영혼의 기술》의 주제는?
이런 가운데 2025년 제13회 서울시립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은 어떤 다름을 만들고 있을까요? 이 전시는 ‘비엔날레’를 거대한 이벤트가 아니라 불러내는 의식, 대화의 장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듯 보입니다. ‘강령회’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접속하는 의식을 뜻합니다. 이번 비엔날레는 기술과 미디어를 통해 잊힌 기억과 사라진 서사를 소환하고, 그 과정에서 예술의 근원적 기능 즉, 다른 시간과 존재를 연결하는 능력을 다시 확인합니다.
전시는 미디어를 단순히 이미지의 생산 장치로 보지 않습니다. 화면과 신호, 음향과 기록은 모두 현실의 저편을 불러오는 매개입니다. 전시장 안의 영상과 오브제, 퍼포먼스들은 일종의 ‘접신적 기술’로 작동하며, 망각된 기억을 호출하고, 억눌린 존재들을 드러냅니다.
- 고은’S PICK – 주요 작품
특히 이번 비엔날레의 의미 있는 성과 중 하나는 여성 작가들의 재배치입니다. 19세기 영매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재조명된 조지애나 하우튼(Georgiana Houghton), 영적 세계를 회화의 언어로 번역한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그리고 치유와 에너지를 도식화했던 엠마 쿤츠(Emma Kunz) 등은 오랫동안 예술사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이번 전시에서 단순히 복권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로 자리합니다.
4. 더 풍성한 감상을 위한 배경 지식
감독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의 철학적 배경을 이해하면 이번 전시의 방향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는 러시아의 급진적 사상 운동인 코스미즘(Russian Cosmism)’을 오랫동안 탐구해왔습니다. 코스미즘은 20세기 초 철학자 니콜라이 표도로프(Nikolai Fedorov)로부터 시작된 사조로, 인간은 과학과 예술의 힘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우주로 확장해야 한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표도로프는 “박물관은 부활의 실험실”이라 말하며, 예술과 과학이 인류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도클은 이러한 사유를 영상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영상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영화 This Is Cosmos (2014), The Communist Revolution Was Caused by the Sun (2015), Immortality and Resurrection for All! (2017)은 우주, 혁명, 부활이라는 주제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지식을 생산하고, 사유를 확장하며, 공동체의 윤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탐색했습니다. 이번 〈강령회〉는 그 철학을 전시 공간으로 확장한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5. 전시를 본 후 함께 얘기해 볼 것
이번 비엔날레에서 예술은 단순히 재현이나 비평의 수단이 아니라, “지식의 실천이자 사회적 강령”으로의 기능을 시도 합니다. 기술은 신비와 영성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것을 재매개하는 통로로 등장합니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접속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국 《강령: 영혼의 기술》은 예술이 여전히 지식 생산과 사회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가?라고 묻는 듯 합니다.
거대한 스펙터클의 자리를 대신해,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 지식의 재생, 그리고 감각의 공동체를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금 비엔날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경험이 궁금해 집니다:)
재용의 노트
1.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어떤 맥락에서 시작됐을까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SMB)는 2000년 ‘미디어_시티 서울 2000’으로 시작했습니다. 광주비엔날레(1995)가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무거운 역사를 배경으로, 부산비엔날레(2000)가 항구도시 정체성을 갖고 출발한 것과 달리, SMB는 밀레니엄 전환기 디지털 열풍 속에서 탄생했지요. 당시 서울은 “디지털 수도”, “IT 강국”을 외치던 시기였고, 비엔날레는 그 기술적 정체성을 미술로 번역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20년 넘게 흐른 지금, SMB가 이 정체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만들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광주비엔날레는 예산 40-50억 원으로 국제 담론을 만들어내는 반면, SMB는 16억 원 정도로 “미디어”라는 느슨한 우산 아래 매번 다른 방향을 시도하거든요. 이번 13회 전시에서 안톤 비도클을 감독으로 선택한 것도 재밌는 지점인데요—기술보다는 “영성”을, 플랫폼보다는 “망자와의 대화”를 말하는 사람을 데려온 건, SMB가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묻고 있다는 신호 같습니다.
2. 안톤 비도클은 누구이고, 왜 지금 서울일까요?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 b.1965)은 러시아 출신 작가이자 e-flux 창립자입니다. e-flux는 1998년부터 미술계 정보를 이메일로 뿌리던 리스트로 시작해서, 지금은 온라인 저널, 출판, 전시까지 아우르는 지식 플랫폼으로 성장했지요. 그러니까 비도클은 “플랫폼 빌더”이자 “지식 인프라 설계자”로서 미술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러시아 코스미즘(Russian Cosmism)을 연구하고 재해석하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러시아 코스미즘은 19세기 말 니콜라이 표도로프(Nikolai Fedorov)가 제시한 철학인데요, 한마디로 “과학과 예술로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인류가 우주로 확장해야 한다”는 꽤 급진적인(어떤 사람들은 “미친”이라고 하지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표도로프는 박물관을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부활의 실험실”로 봤어요—유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게 결국 망자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기술이라는 겁니다. 이 사상은 소련 우주개발의 철학적 배경이 됐고, 비도클은 이걸 영화 3부작으로 풀어냈지요.
이번 전시 《강령: 영혼의 기술》은 그의 오랜 관심사를 집약한 것입니다. “강령회(séance)”는 망자와 산 자가 만나는 의례고, “기술”은 그 만남을 매개하는 도구지요. 전시는 영매, 추상화, 박물관, 영화, AI를 모두 “영혼과 소통하는 기술”로 배치합니다.
근데 여기서 질문: 왜 이 이야기가 지금 서울에서 필요한 걸까요?
3. 유럽 중심의 서사 & 로컬과의 거리
첫 번째 불편한 질문입니다: 서울에서 하는 비엔날레인데, 왜 서사의 중심은 유럽인가요?
참여 작가 49명/팀을 보면 한국 작가들도 있습니다. 백남준, 이승택, 박찬경, 권병준, 안민정, 윤형민. 일본의 데구치 오니사부로, 대만의 천잉쥐(Yin-Ju Chen)와 쉬자웨이(Hsu Chia-Wei), 홍콩의 Angela Su 등 아시아 작가들도 적지 않지요. 그러니까 “아시아가 없다”고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시의 서사 구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전시는 19세기 유럽 여성 영매-작가들—조지애나 하우튼, 힐마 아프 클린트, 엠마 쿤츠—에서 출발해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 러시아 코스미즘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심축으로 삼습니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배치되고, 박찬경이나 이승택 같은 한국 작가들도 참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한국적 영성 전통이 전시의 핵심 담론이 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볼까요? 이 전시가 “강령회”를 말한다면, 한국의 굿은 왜 주변부에 머물까요? 무당은 망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전문가고, 굿은 강령회의 한국적 형식입니다. 서울 곳곳에는 무속 신앙의 흔적이 남아있고, 이승택이나 박찬경 같은 작가들도 이 전통을 작업에 녹여왔지요. 하지만 전시의 틀은 유럽 오컬티즘과 러시아 코스미즘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한국의 무속이나 일본의 신도는 “지역적 사례”로 배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단순히 작가 선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영성 전통이 “보편적 담론”이 될 자격을 갖는가에 대한 위계입니다. 유럽 강령회는 “예술사의 혁명”이 되지만, 한국 굿은 “로컬 컬러”로 남는 거지요. 서울에서 하는 비엔날레가 서울을 전시의 배경이 아니라 담론의 중심으로 만들려면, 이 위계를 뒤집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4. 현지 언어에 대한 존중은 어디에?
두 번째 불편한 질문입니다: 텍스트 저자와 편집자는 샤웃아웃하면서, 한국어로 지식을 매개하는 노동은 왜 보이지 않을까요?
비도클과 e-flux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핵심 가치로 내세웁니다. 실제로 이번 전시를 위해 e-flux Journal 156호가 특별호로 나왔고, 편집자 Ben Eastham부터 시작해서 기고자 Anton Vidokle, Johanna Hedva, Lukas Brasiskis, Elena Vogman, Hallie Ayres, Maria Lind, Namsee Kim 등의 이름이 모두 명시되어 있지요. (*마지막 Namsee Kim 은 한국 저자 김남시임)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SNS에서도 “미디어버스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 발행하는 도록”이라면서 영어권 저자들 이름을 하나하나 샤웃아웃합니다.
이건 좋은 일입니다. 지식 생산자를 존중하는 태도니까요.
하지만 한국어 번역자와 편집자는요? 도록의 한국어 텍스트를 누가 번역했는지, 전시장 벽의 작품 설명을 누가 옮겼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편집 노동이 들어갔는지는 대부분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단순히 “크레딧 누락”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현지 언어로 지식을 생산하고 매개하는 노동에 대한 존중 부족을 드러내는 구조적 태도입니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전환이 아닙니다. 개념을 옮기고, 맥락을 설명하고, 때로는 원문에 없는 주석을 달아야 한국 독자가 이해할 수 있지요. 특히 러시아 코스미즘이나 유럽 오컬티즘처럼 낯선 개념들을 다룰 때, 번역자는 사실상 또 다른 저자입니다. 하지만 이 노동은 비가시화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겁니다: 한국어는 단지 “번역되는 언어”일 뿐, “지식이 생산되는 언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도록의 한국어판은 영어 원문의 “번역본”이지, 한국어로 새롭게 사유하고 쓰인 텍스트가 아닙니다. 한국 비평가나 연구자가 한국어로 쓴 에세이가 도록에 실렸을까요? 김남시 같은 저자도 있지만, 전체 담론의 틀은 여전히 영어권 저자들이 설정합니다.
“지식의 민주화”를 말하는 플랫폼이 정작 현지 언어와 현지 지식 생산에 대한 존중을 보이지 않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유럽/영어권에서는 지식이 “생산”되고, 한국/한국어에서는 지식이 “소비”되는 구조가 반복되는 거지요. 번역자를 크레딧하지 않는 건 이 위계의 증상입니다.
* 혹시나 해서: 저는 이번 비엔날레의 여러 통역, 번역 가운데 일부를 담당했습니다. 저만 아니라 여러 통번역가가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지요.
5. 여성 영매-작가들의 재발견, 그리고 남은 질문들
이 전시의 중요한 성과는 조지애나 하우튼, 힐마 아프 클린트, 엠마 쿤츠 같은 여성 작가들을 “미술사 밖의 영매”에서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재배치한 것입니다. 하우튼은 1860년대에 이미 추상 회화를 그렸지만 무시당했고, 클린트는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렸지만 사후 20년간 전시 금지를 유언으로 남겼지요. 쿤츠는 치유자로 살다가 기하학적 드로잉을 남겼지만, 생전에 미술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들 작업은 오랫동안 “미신”, “오컬트”, “비전문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됐습니다. 근데 21세기에 갑자기 “재발견”되는 겁니다. 클린트는 2018년 구겐하임 전시로 미술계 슈퍼스타가 됐고, 쿤츠는 스위스 파빌리온에 전시됐지요. 이 재평가는 물론 정당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질문도 생깁니다—왜 지금인가?
한 가지 대답은 미술계가 “합리성”과 “남성 천재” 중심 모더니즘 서사를 재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 직관, 비과학적 지식도 예술의 원천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다른 대답도 있습니다—미술 시장과 제도가 “새로운 마스터”를 필요로 한다는 것. 클린트 작품은 이제 수백만 달러에 팔리고, 전시는 관객을 끌어모읍니다. 재발견은 정의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소비 기회이기도 하지요.
이 전시는 그 모호함 속에 있습니다. 여성 작가들을 재평가하는 건 중요하지만, 왜 하필 유럽 여성들만인가요? 한국이나 아시아의 영성적 전통 속에서 작업한 여성 예술가들은요? 그들은 여전히 “재발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 비엔날레 제도의 딜레마
비엔날레는 태생적으로 모순적입니다. 로컬 정체성을 표방하지만 국제적 정당성이 필요하고, 실험을 약속하지만 관객 동원에 신경 써야 하고, 비판적 담론을 생산한다고 하지만 관광 산업과 결탁하지요. SMB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번 전시는 “미디어” 태그에서 벗어나 “영성”을 말하려 합니다. 이건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 영성이 러시아 코스미즘과 유럽 오컬티즘에 국한된다면, 이건 또 다른 형태의 문화 수입이지요. 서울의 로컬 맥락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유럽 담론이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번역 노동 비가시화는 이 위계를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관객은 한국어로 전시를 경험하지만, 그 텍스트를 만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요. 지식은 유럽에서 생산되고, 한국에서는 소비됩니다. 번역자는 그 사이에서 투명하게 사라집니다.
7. 던져야 할 불편한 질문들
이 전시는 많은 것을 시도합니다. 망자와의 대화, 여성 작가 재평가, 박물관 재정의. 하지만 다음 질문들은 남습니다:
- 서울에서 강령회를 말하면서, 왜 한국 굿과 무속은 빠졌을까요?
- 아시아 영성 전통은 “보편적” 담론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아니면 안 되는 건가요?
- 지식의 민주화를 말하는 플랫폼이 번역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건 어떤 모순일까요?
- 여성 작가 재발견이 미술사 정의의 실현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시장 논리인가요?
- SMB는 “미디어 비엔날레”에서 무엇으로 진화하려는 걸까요, 그리고 그건 성공적인가요?
이 질문들은 전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시가 열어놓은 공간 안에서, 우리가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지점들이지요. 비도클 작업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 작업이 서울에 착륙할 때, 이 도시 맥락과 어떻게 마찰하고 대화하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국제 전시의 배경”으로만 남을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서울은 배경이 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가진 도시잖아요?
함께 생각해볼 (감상 후) 추가 질문들
- 예술과 과학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 예술과 과학은 정말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과 그 이유는?
독서 노트
솔직히 전시를 보고 난 후에는 다소 당혹스러웠다. 굳이 서울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에서 내가 왜 서구의 강령술이나 기독교에 대한 작품을 그렇게 많이 봐야 하는지 이해가 어려웠다.
– JOO
예술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과거에 무의식의 세계가 예술가를 통해 재해석 되었다면, 지금은 예술가의(또는 우리 집단의) 무의식이 AI를 통해 구현되는거 같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신의 형상이든, 단순한 감정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 매체가 기술로 옮겨가는 것이 흥미롭다.
– COO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영혼이란 매개를 통해 풀어내고 해석하는 것. 강령, 무속, 종교 등 그간 비이성의 영역이라 치부했지만 영혼을 매개로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려 한다는 점은 누구보다 우리의 인간의 사유와 통찰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OJO
미디어 시티를 추구하는 서울시의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라. 억지스럽진 않겠지 내심 걱정하며 13회를 맞은 비엔날레 역대 주제들을 돌아봤더니 올해가 가장 흥미로워 보였다.
– OㅇO
감독들은 영성주의 미학을 통해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담론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제도 안에서 열리는 비엔날레가, 그것도 전시인지 비엔날레인지 의문인 미술관 속 얌전한 몇 개의 전시관의 연속이 과연 신자유주의적 관성을 깨고 진정한 강령의 장이 될 수 있을까?
– OㅇO
우리가 알 수 없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 시기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코로나, 전쟁, AI, 주식까지..) 어떻게든 이 불예측성을 받아들여야만 하기에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점술 운세 등에도 그 어느때보다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강령이라는 주제로 비엔날레도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ㅇOO
미디어를 매개로 생각을 하고 이런 유형의 매개를 위한 은유로 세앙스를 사용한다는 말도 처음엔 어려웠는데, 글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처음 들어보는 세앙스라는 단어도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OㅅO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와 k-오컬트 유행에 대해”
인공지능이 세상의 질서를 대신 계산하는 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불안을 감당할 언어를 잃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 영혼의 기술〉은 이 결핍은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들은 잊힌 기억과 사라진 존재를 불러내며, 불안한 시대가 만들어낸 또 다른 기술, 즉 영혼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무속신앙의 재조명은 미신이라기보다 불안을 다루는 기술이다. 살아남기 위한 언어다. 우리는 그 말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위로 받기 때문이다.
– OㅇO
사랑이 끝난 사람들의 마음처럼 종교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그들이 내적 허무를 채우기 위해 신을 닮은 인간인 천재들을 신앙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현대 미술계가 작동하는 방법이었다면 천재들에 대한 믿음에도 반응하지 않게 된 미적 쾌락 불감증자들에게 기독교로 복귀하지 않고도 몰입해 볼수 있는 영역이 강령에서 다루는 아름다움이며 그들의 경험에서는 탐험되지 않았던 영역이라 미적 쾌락 구조가 한동안 이런 사람들에게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OㅇO
아무래도 지금은 우리에게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의 임영주 전시, 그리고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힐마 아프 클린트 전시까지 모두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신비적 감응’, ‘비이성적’ 이라는 흐름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 넷플릭스 방영된 드라마 제목이 떠올랐다. ‘다 이루어질지니!’)
– ㅇOO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 대한 글들은 강령술 또 무속신앙과 같은 다소 비이성적이고 영적인 내용을 작품의 주제로 채택한 창작물에 대한 것들이다. 이 글들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은 ‘작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 작품을 창작하였는가?’에 대한 것이 아닌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는가?’였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면 ‘작가들은 왜 이 작품을 창작할 수밖에 없었는가?’하는 호기심과 의구심에 가깝다.
– OㅈO
정동교회에 결혼식을 갔다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는 강령: 영혼의 기술을 의도치 않게 예습을 하였다. 미술이나 예술의 경우 삶과 죽음, 종교가 연관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부분은 인간 본연의 두려움을 파헤치는 것이라 자본주의의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해도 앞으로도 계속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 ㅇO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