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임영주

고은의 노트

“명랑 샤먼”은 임영주를 떠올릴 때 문득 스치는 표현이다. 예전에 그의 작품을 다룬 리뷰의 제목이기도 했는데, 적확한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유쾌하고 잘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를 이렇게 부른 비평가는 임영주와 그의 책에 관해 아래와 같이 평했다.

“ 임영주 작가를 세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인천행 지하철에서 그녀가 출간한 『괴석력』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웃기는 사람인지 진지한 사람인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그녀의 언어유희, 상호배제적 프레임을 상호간섭하게 만드는 비상한 지성에 놀란 채로 건너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개의치 않으면서 연신 폭소를 터트렸다.” 양효실_명랑 샤먼의 무차별적 평등론_2018 

그리고 나는 언젠가 그의 전시 리뷰에 마지막 글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안면근육의 판단 불능 상태를 만들어낸다.”송고은_오조오억개의 암묵지[暗默知]_2018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업은 한층 더 진지한 문장들로, 현대 문명의 특정한 맥락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듯 보인다.

“임영주가 정의한 이 계보는 1960년대 대항문화에서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에 이르며, 자아를 해체하고 육체를 초월하며 비물질에 접근하여를 욕망이 이끄는 ‘테크노-신비주의’라는 일관된 흐름을 드러낸다.” 마사조셉_임영주, 기술의 사후세계와 빈 무덤, 2025”  

‘명랑 샤먼’이든, 서구 역사 속 ‘테크노-신비주의’의 계승자이든 이 모든 정의에 작가가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임영주의 ‘별난짓’과 ‘헛것’에 대한 탐구가 이제 현대미술계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MMCA 퍼포먼스를 보고 동료들과 나눴던 카톡창에 “꾸준히 자기 시각언어로 설득해나가는 과정이 현대미술이라면 영주작가님 너무 잘하구 계셔서 즐겁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를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오늘의 작업을 마주했을 때 느낀 내 솔직한 문장인듯 하다.

이런 임영주 작가의 태도와 방식은 사실 현대미술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일상의 가장 사소한 순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포착하고, 그것을 끈질기게 해석하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확장해가는 방식은 오히려 동시대 예술가들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탐구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히토 슈타이얼의 《미션 완료: 벨란시지(Mission Accomplished: BELANCIEGE)》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이미지와 디지털 알고리즘을 병치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기술과 자본의 권력 구조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아이 웨이웨이의 《Hoarder》 역시 고독사한 사람이 평생 모아온 물건들을 그대로 옮겨와 구성한 설치작업으로, 수많은 사물이 죽은 이의 성격과 삶의 방식, 외로움까지 조용히 드러내며 기억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Koki Tanaka의 《Provisional Studies: Workshop #7 — How to Live Together and Sharing the Unknown》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자동차 안에서 진행된 그의 인터뷰 퍼포먼스는 ‘이동 중’이라는 매우 일상적인 상황을 그대로 작업의 장으로 전환해, 차 안에서 오가는 사적이고 느슨한 대화의 흐름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술이 미술관 같은 제도적 공간을 벗어나서도 새로운 감각과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탐색한다. 이렇듯 미술은 더 이상 일상과 동떨어진 아름답고 숭고한 무엇을 찾아가는 여정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변의 가장 하찮고 사소한 일들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발명해내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오늘은 임영주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대미술의 새로운 논리 구조와 그 여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재용의 노트

  • 아래 노트는 박재용이 쓰고, LLM 기반의 검색 도구를 통해 추가 자료 조사 및 팩트체크, 검증한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구멍을 통해 보는 세계

임영주의 작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구멍’이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형태적 반복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자료를 모으고 작품을 보면 볼수록, 이 구멍들이 전부 ‘무언가를 보기 위한 장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망원경, 현미경, 카메라, VR 헤드셋 같은 기술적 도구들이 있죠. 그런데 임영주는 여기에 태호석의 자연적 구멍, 촛대바위의 파도에 뚫린 구멍, 『인간과나』 책 속 각주가 만드는 텍스트의 틈새도 똑같이 나열합니다.

17세기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을 때, 교황청은 그게 ‘악마가 보여주는 환영’이라고 했습니다.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처음 봤을 땐 사람들이 그의 정신이상을 의심했죠. 새로운 ‘보기 장치’는 언제나 불안과 의심을 동반했다는 겁니다.

임영주가 『인간과나』에서 정의한 ‘외계(外界)’는 우주 저 너머가 아닙니다. 그건 내 몸 바깥의 모든 것내 감각으로 직접 닿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바깥’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구멍을 만들어왔어요.

그런데 『인간과나』 소개 글에서 정말 중요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 작업은… 외부/외계에 다다르기 위한 구멍을 만드는 것이거나 혹은 스스로 구멍이 되는 일이다.”

음, “스스로 구멍이 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VR 헤드셋을 쓰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통로'(?)명상이 실패한 자리에 생긴 것

올해 한 인터뷰에서 임영주는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수행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가려던 시도가 실패하면서, 그것이 기술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해요. VR은 명상이 실패한 자리에 생긴 거죠.”

이 문장이 왜 중요하냐면, 실리콘밸리의 테크 CEO들이 명상과 VR을 동시에 하는 아이러니를 정확히 꿰뚫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명상(수행)과 VR은 구조가 똑같아요:

  • 현실로부터 일시적으로 이탈한다 > ‘다른 차원’을 체험한다 > 자아의 경계가 흐려진다 > 시공간 감각이 변형된다

그런데 임영주가 묻는 건 이겁니다. 왜 명상만으로 안 되는 걸까? 왜 인간은 명상이 ‘실패’하면 그걸 기술로 보완하려 할까?

『인간과나』에 등장하는 ‘그 인간’이라는 캐릭터는 온갖 환상술을 연마합니다. 축지법, 벽력술, 관상, 수맥 찾기… 근데 전부 어딘가 어설프고 불완전해요. 완벽하게 성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장치’가 필요해지는 거죠.

2023년 현시원이 쓴 비평이 바로 이 지점을 포착합니다. 임영주가 VR을 ‘헛것의 장치’로, 더 정확히는 ‘실패한 수행의 대체 기술’로 본다는 겁니다.

기술과 믿음은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

장지한(2021)이 쓴 「믿음의 기술, 기술의 믿음」은 제목부터 정곡을 찌릅니다. 기술과 신앙이 애초에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촛대바위’의 사례를 보면 명확해집니다.

  1. 파도에 깎인 자연적 돌기둥
  2. 누군가 사진 촬영
  3. SNS에 확산
  4. ‘촛대바위’, ‘소원 바위’로 명명
  5. 성지 순례지가 됨

이 과정에서 ‘기술(사진, 인터넷)’과 ‘믿음(성스러움)’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기술이 믿음을 만들고, 믿음이 기술을 정당화합니다. 이건 암호화폐도 마찬가지예요. 블록체인 기술은 ‘탈중앙화’라는 유토피아적 믿음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VR 메타버스는 ‘또 다른 현실이 가능하다’는 ‘신앙’ 없이는 의미가 없어요.

자정, 0시, 시간이 멈추는 구멍

<고 故 The Late>(2023-2025)는 60분 사이클로 반복되는 VR 작품입니다. 읽을 거리로 공지한 엘르 인터뷰를 보면, 임영주 작가에겐 ‘0시’가 꽤 중요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요컨대:

  • 본인의 실제 생일 vs. 가짜 생일(출생신고 지연)
  • 자정(0시 00분) = 하루의 끝이자 시작
  • VR 속 ‘빈 무덤’ = 죽음의 시뮬레이션이자 재탄생의 공간

이 부분은 임진호(2021)가 쓴 「기다림의 바깥」과 연결됩니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사건은 1992년 다미선교회 신도들이 10월 28일 자정에 휴거를 기다렸던 이야기죠. 예수 재림은 오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그 순간은 현실보다 더 진짜같은 무언가였을 겁니다.

이건 임영주의 <Waiting M>(2021)과도 비슷합니다.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M>에서 주인공들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2020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상의 종말’을 기다렸죠. 그런데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끝없는 기다림만 남았어요. 기다림이 끝나는 게 아니라, 기다림 자체가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강아지가 빙글빙글 도는 이유

<카밍 시그널(Calming Signal)>(2023/2025, 프리즈 서울)은 어머니의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엄마가 ‘강아지가 왜 빙글빙글 도는 걸까?’라고 물었어요. 그게 불안 신호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인간도 불안할 때 회전하지 않나 싶었죠. 그리고 지구도 계속 회전하잖아요. 불안정하게.”

임영주 작가의 연상은 이렇게 흘러갔을 겁니다. 강아지의 회전 → 인간의 회전춤(수피 댄스, 살풀이춤) → 지구의 자전축 기울어짐(23.5도) → 기후 위기

얼핏 황당해 보이는 연상이죠. 그런데 양효실(2018)이 말한 “무차별적 평등론”의 핵심이 바로 이거 아닐까요. 강아지의 회전, 인간의 회전, 지구의 회전을 동일선상에 놓는 순간, 우리는 웃어야 할지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까마귀, 조율자, 그리고 불협화음

읽을거리로 공지했던 노블레스 인터뷰에서 임영주는 자신을 ‘까마귀’에 비유합니다. 길흉의 징조를 전하는 새로 알려진 까마귀. 그런데 작가는 단순히 ‘전달’만 하지 않습니다.

읽을거리로 공지한, 여러 비평가의 글에서 작가는 각기 다른 역할로 정의됩니다.

  • 안소현(2017): “관찰자이자 참여자”
  • 현시원(2023): “각주를 다는 사람”
  • 신승오(2024): “제3의 눈을 여는 안내자”

그리고 임영주 본인은 스스로를 “불협화음을 만드는 조율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땐 이 정의가 가장 흥미롭습니다. 보통 조율자(tuner)라고 하면 악기를 정확한 음정에 맞추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임영주는 어긋난 음을 만들어요.

『인간과나』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본문과 각주가 서로 어긋나 있어요. 각주가 본문을 보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어긋난 단어들”이 끼어들면서, 우리는 어디를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져요.

박찬경(2016)은 이걸 “식별 불가능성(unidentifiability)”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영주의 작품들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의 태도를 취합니다. <길안내(吉길안내)>(2018)에서 관객에게 행운의 돌을 나눠주는데, 그게 정말 행운을 주는지는 알 수 없어요. 『괴석력』(2016)은 돌의 영험함을 진지하게 논하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이 식별 불가능성이야말로 현대미술이 대중과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판단을 원하니까요. “좋다/나쁘다”, “예술이다/아니다”라는 명확한 선을 원합니다. 그런데 임영주는 그 선을 계속 흐립니다.

왜 지금, 헛것인가?

7년 전 양효실은 임영주를 “명랑 샤먼”이라 불렀습니다. 7년 후 송고은은 (동료들과 나눈 카톡창에서) “꾸준히 자기 시각언어로 설득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이 무언가가 변했을까요? 제 생각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임영주는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제서야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2020~2022)을 거치며 우리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허망)한지 체험했습니다. 집에서 줌으로 회의하고, 메타버스에서 졸업식을 하고, NFT에 수억을 투자하는 일들이 벌어졌죠.

그 와중에 타로, 사주, MBTI, 운세가 폭발적으로 유행했습니다. 합리성의 시대에 비합리적 믿음이 폭증하는 엄청난 역설이랄까요.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그는 비합리를 옹호하지도, 합리를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둘이 애초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망원경도, 수맥 탐지봉도, VR 헤드셋도, 무당의 방울도…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없이 ‘바깥’을 상상하는 존재니까요.

작가에게 보낸 질문(들)

  1. 작가 임영주, 생활인 임영주로서의 티피컬한 하루는 어떤가요? (삶과 생활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해서 여쭙는 질문) 많은 사람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일을 하면서 일 주일의 대부분을 보냅니다.ㅎㅎ
  2. ‘한국사회의 미신과 합리성 탐구’  라고 작가의 주제의식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에 관심 갖고 작업을 시작하게된 계기 무엇일까요?
  3. ‘드라마는 세계’의 공동 저자로서, 책을 만들게 된 과정과 드라마 연구회의 활동이 궁금합니다. 또 작가님의 작업과 이런 번외의 활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4. 최근 작업들에서 ‘퍼포먼스’라는 형식으로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가져오시는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다 ‘전통적’인 작품 형식에 대한 의견도 궁금합니다.
  5.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좀 더 비물질적(?) 작업 실험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생각과, 작업에 일어난 변화가 궁금합니다. (VR 헤드셋으로 만드신 작품을 경험할 때 유체이탈(?)을 했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어요.)
  6. 믿음의 대상 보다는 믿음의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작가님 작품에서 다양한 종류의 믿을을 갖은 군상들이 등장하는데, 작가님이 개인적으로 지금 믿고 있는 것, 또 믿음의 어떤 과정을 지나고 계신것 같나요? 
  7. 저는 요즘 ‘유머 ‘에 대한 생각을 하곤하는데, 작가님의 작품에는 항상 묘한 웃음을 짓게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의도하신 걸까요? 그리고 작가님은 스스로가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작가님이 요즘 가장 재밌게 본 쇼츠/밈/영상/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8. 작가님의 작업은 문화적인 맥락이 상당히 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관객 반응을 경험하거나, 큐레이터, 비평가 등과 이야기 나누어보셨을지 궁금합니다.
  9. 요즘 작업실에서 하시는 작업은 무엇이 있나요? 

독서 노트 발췌

윤O준: 경고문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솔직히 짜증스러울 작품이다. 그런데 그게 의도였다면? 작품이 특정 심리상태를 타깃팅한다는 건 흥미롭다.

이O준: 작가의 성장과정이나 삶의 궤적이 궁금해졌다. 샤먼 할머니 배경이 작업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이런 세계관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함O연: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임영주의 작업은 그 세계로 가는 문을 조금 열어준 것 같다.

임O빈: 과학과 종교, 믿음의 구조에 대한 질문이 계속 남는다. 우리는 왜 믿는가? 믿음 없이 살 수 있는가? 임영주는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지만, 작품 전체가 이 질문으로 가득하다.

이O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진짜로. VR 체험 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귀신 붙어온거 아닐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쯤은 진담이었다. 나는 “이입은 안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입을 하면 너무 잘 하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망 장례 체험 같은 느낌이었다.

최도하: 작가는 어떻게 이런 세계관을 구축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퍼포먼스의 의도성과 우연성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이O호: “공통의 시공간”, “반복적으로 수행하며” – 직접 경험의 진본성. 책이나 영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임영주의 작업은 ‘거기 있어야’ 한다.

이O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몸으로 경험하는 순간, 예술은 다른 차원이 된다. 임영주의 작업은 그 경험을 강제한다.

백O성: 근본적 질문: 퍼포먼스에 미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작가는 가치를 본인의 언어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지? 평가 불가능성 자체가 작품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O헌: 아는 것과 보는 것의 관계. 우리는 아는 것만 보는가, 보는 것만 아는가? 임영주는 이 순환을 끊으려 한다. 아니, 오히려 그 순환을 가시화한다.

조O영: 정신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가치관이 변화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미련> 퍼포먼스를 경험했다. “죽었다 삶으로 돌아오고 나니” 삶에 대한 미련이 구체적 형태로 발견되었다. 현대미술의 치유적 기능을 재발견했다. 잠깐 좀 죽었다가 돌아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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