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예술의 발명]

  • The Invention of Art (예술의 발명)
  • Larry E. Shiner (래리 샤이너) 저, 조주연 역
  • 원서 2001년 출간, 번역본 2015년 출간

첫 번째 책부터

꽤나 묵직한 주제를 다룬 두꺼운 책이라 많이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두 번째 책은 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을 리마인드하며, 첫 모임의 발제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박재용의 노트)

현대 미술, 동시대 미술, 초현대 미술

얼마 전 참여했던 한 아티스트 토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주변화된 신체, 퀴어와 같은 존재들이 끊임없이 컨템포러리 아트의 장과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는 이랬습니다. “컨템포러리 아트는 ‘다름’이 하나의 문화적 자본 혹은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인정받는 장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컨템포러리 아트의 장은 사회 일반에서 그 ‘다름’으로 인해 배척받는 존재들이 활개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하죠.”

오늘날(이라 함은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 ‘현대 미술 관객’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미술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한된 사회 계층 안에서만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착시는 아닐까요? 혹은 이른바 ‘현대 미술’을 대하는 창작자와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 감상자, 혹은 소비자가 각자 동상이몽 중인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이 복잡해질 때 즈음 기대고 싶은 생각은 바로 ‘예술’이 지닌 ‘절대성’을 호출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뭐라고 하든 예술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선은 논의를 덮을 수 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단 미술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실은 그 역사가 길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의 책 [예술의 발명]이 말하는 내용 또한 마찬가지고요. 책의 저자가 속한 서구가 아닌,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민주주의를 도입한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기도 하고요. 이 책은 우리가 기본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예술 개념과 이를 둘러싼 제도가 18세기에 ‘발명’된 것임을 찬찬히 짚고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은 우리들, 독자들의 과제는 저자가 생각한 틀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은의 노트) 

예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책을 쓴 김주혜씨의 인터뷰를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고, 현대문학은 ‘철학이 너무 적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자문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예술은, 좋아하는, 함께 만드는 예술은 과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적어도 예술작품으로써 문학을 창작하려고 한다면 다음 두 가지는 각오하고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이렇게만 살아야한다! 라는 자기만의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후에는 종적을 감춘 듯이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 유효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도 정의하지 않고, 자율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세계에도 엄연히 방향과 체계는 존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목적의식이 너무 강렬했고, 또 철저히 실패했던 시대를 지나며 인간은 일방적인 추구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현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문화적 토대의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김주혜 작가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 예술이 만일,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가진/가져야만하는 매개체라면, 우리는 이것들을 어떻게 만들고 대할 수 있을까요? 예술은 나의 인테리어 취향이나 재테크 수단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방향타를 설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요?

저는 그런 예술의 힘을 믿는 편에 속합니다.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예술의 영향력이 사실 우리 일상에 쉽게 보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술옹호론자들은 현대예술이 충분히 오염되었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한탄합니다. 가뜩이나 힘든 예술과 순수 예술가들에게 이 책의 저자는 또 다른 매스를 들이댑니다. 서문에 책의 주제를 저자의 친구에게 이야기했을 때 “쓰지 말게! 예술가들은 지금 있는 문제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는 걸 모르나?”라며 반응한 친구 예술가가 눈에 선합니다. 

서문은 사실 이런 반응에 대한 저자의 긴 자기 변호입니다. 이 책은  ‘예술’을 어떤 느낌으로 취하지 않고 ‘개념, 관행, 제도’들로 이루어진 인류사의 발명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순수예술옹호론자들을 놀라게 하지만 거꾸로 예술이 매우 애매해진 오늘의 상황에서 이를 다시 정의하며 그 의미와 목적을 재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똑똑한 아군의 현명한 관점 되기도 합니다. 이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저자는 art와 Art 그리고 고대와 현대의 예술를 구분지어 소개합니다. 저 역시 우리의 모임을 시작하기전에 이 구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술은 ‘000이 예술(art)이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다!’라고 표현하는 삶과 예술이 결합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뜻하지 않으며, 18세기(인상파) 이후 그리고 더 극명하게는 1960년대 팝아트 이후 제도화된 현대예술(Art)을 말합니다. 그래서 만약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여기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현대예술이 아닐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와 논의 구실이 이 책을 선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저자는 역사가이므로, 이런 자신의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다소 난해해 보이는 논제들을 끄집어 냅니다.  “그만하게! 우리는 지금 있는 문제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는 걸 모르나?”라는 생각이 중간 중간 끼어들게도 하지만 이 책 만큼 현대예술의 정의에 대해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찾기 어렵다는 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함께 말할  ‘예술’의 의미를 확인 시켜준다는 지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말한 ‘예술’이어야만 예술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하고, 살아야한다는 가치를 던져 줄 수 있을 것 입니다. 


몇 가지 생각할 질문
  1.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술의 정의를 간단히 정리해본다면…?
  2. (개인적 차원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art’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Art’은? 소문자 예술art과 대문자 예술Art를 떠나, 삶 속에서 가져가고 싶은 예술은 어떤 것인가요?
  3.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록, 예술은…?

독서 노트들

제목이 ‘예술의 발명’이라 하여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읽다 보니 ‘예술의 기원’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과감하게 표지에 박아넣은 책은 무슨생각일까? 최초의 예술(로 추정되는)은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술의 정의는 상당히 넓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시작에는 예술과 장인의 의미가 혼재돼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들어본 예술, 순수 예술과 같은 단어는 시작부터 있던 단어는 아니고 그 분류 조차도 없었다고 말하니까요. 

– ㅂOO (안타깝게 불참)

예술이라는 것에 대하여 변천해온 역사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공부를 해본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관심있게 생각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순수예술, 예술가가 보여주는 게 주관적이면서 복합적이기 때문에 다 좋은 거라는 생각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감동과 여운이 남는 게 맞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 현대적인 것은 과거의 역사속에서 스토리와 영감이 있으며 복각해 나가고 거기에 트랜드를 녹여내는 일이기에 흥미를 가지고 좀 더 나에게 맞는 예술분야를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 ㄱOO

“예술이 계속 넓어지기만 한다면”

(아트페어에서의 일화와 함께)

예술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려면 24개월이 필요했습니다. 

근로 소득으로 당장 살 수 없는 작품, 아득하고 영롱하게 느껴지더군요, 

재화로 책정된 가치는 어떤 방식으로 매겨졌을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은 

예술과 괴리감을 제공하고, 스스로 관심 두지 않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구입하기 어려운 요리를, 소화할 수 없다고 하여 

맛조차 느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중략)

예술의 범위를 넓혀왔으나, 

인간을 이해하려는 맥락에서 발달한 이 역사를 

알지 못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얇고 옅어지고,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길까봐 두렵습니다.

예술이 가치와 의미의 결집체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 ㅎOO

“…신을 버린 사람들도, 마음에 중심, 신의 자리가 비워져 있을때 공허의 공포를 느낀다. 발명된 예술은 이 빈자리를 뿌듯하게 채워준다. 구원의 확신같은 만족을 준다.”라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저는 받았습니다.

– ㅇOO

뒤샹은 자신이 속해있던 독립예술가 협회에서 혹평을 받은 <샘>에 익명으로 “선택 때문이다. 그는 일상생활의 용품 하나를 가져다가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 아래 위치시킴으로써, 그 용품의 유용한 의미가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물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한 것이다.”(p.444)라며 <샘>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의 의미는 ‘선택’인 것인가? 관점을 바꾸어 예술로서 바라보면 예술인 것인가? 너무 주관적인 영역이다.

김환기는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향안, 빨리 와야겠다. 이런 것 가지고는 실감이 안나니 이야기가 안되. 오른쪽은 시작해 본 거와 왼쪽은 전에 것 그대로인데 엷게 그려본거야. 나는 오른쪽 그림에 매력을 느껴요. 바닥은 순백색이고 주로 빨강, 파랑, 녹색. 향안도 눈이 영롱해지지 못했을 거야. 서울의 바쁜 생활 속에서는 당신이 발달한 시각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겠지. 빨리 와서 그림을 봐주어요. 내 그림에 감동이 되었다가도, 가다가는 회의가 생기고 그래요.”(김환기, 1964)

언젠가 읽었던 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 젊은 여류 작가는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혹평에 무너져버린다. 그리고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작품에 깊이를 강요했던 것 같다.

작품을 평가하는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은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김환기 작가도 자신이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있음에도 세컨 오피니언을 구하듯이 말이다.(물론 그에게 호의적인, 절대적으로 지지해주는 단 한명의 사람, 그 사람의 의견만으로 충분하겠지만.)

– OOㅎ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예술이 사회와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이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하는 것 이상으로, 문화적인 혁명과 진보의 주요 동력 중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 ㅂOO

지금의 예술의 정의와 구분이 몇백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저자가 얘기하는 고대 로마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변하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과거 예술가와 장인의 구분에서 있다면 현재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금의 아이돌은 저자가 얘기하는 그리도 현대에서 구분하는 정의로는 예술가일까? 

– ㄱOO

“예술의 발명 책 표지에 집착하다”

발명은 아직 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해 내는 작업이다. 

나는 이 저자가 예술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예술의 관념이 변천해온 역사를 간략히 알려주는 책을 발명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지의 작품은 만레이 선물 작품이다. 왜 이걸로 했을까 궁금해 작품 검색을 해보았다. 

“만레이는 뒤샹과 완전히 똑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흔히 아는 다리미 기능을 없애 버렸다. 이로 인해 변기는 변기가 아니고, 다리미는 다리미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것 다다 예술이라고 한다. “

이 내용을 읽고 들어가는 글에 [예술 같은 건 존재 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中)] 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면서  

당연히 예술이 있었다고 생각 했던 나의 신념을 깨뜨렸다. 

예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미가 단순히 옷을 다림질만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도 될 수 있다.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은 표지의 사진이라고 생각 했다.

– ㅈOO

“지난 달의 궁금증이…”

지난달 현대예술에 대한 나의 소감을 나눌 때 순수예술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고 했었다. 그말과 동시에 새로 정해진 책에서 순수예술에 대한 기원을 알 수 있어서 신기했다. 심지어 이런 궁금증을 위하여 10년이란 세월 동안 책을 집필했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근데 내가 생각했던 순수예술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고 불려진 계기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공예하시는 분들을 보면 예술가라는 느낌보다는 장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 ㅁOO

이게 나만 쇼킹한 건 아녔는지 학자들은 현재 ‘(순수)예술’의 프레임을 과거 수공예 장인들의 ‘예술’에 덧씌우고자 열심히 시도했다. 어떻게든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예술 활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역사적 증빙을 찾기만 하면 ‘여봐라, 이 시대에도 순수예술이 존재했다!’라고 주장하는 자와 이를 작신작신 팩트로 까는 저자의 첨예한 대립이 책 내용의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우리가 보는 단순 수공예나 기술과 차별화된 이 숭고한 ‘예술’이라는 개념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발생한(혹은 발명된) 것이다. 이말인즉슨 우리가 향유하고 미적으로 관조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ㅂOO

예술이라는 개념의 변천과 확장을 바라보며, 대중으로서의 나는 그 동안 예술을 어떻게 즐겨왔는가 자문해본다.

때로는 고급 클래식 음악회의 정숙한 관객으로서, 미술관의 관객으로서 은연중에 목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서민들이 쓰던 항아리나 술병에 깃든 해학에 가슴따뜻한 기쁨을 느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정의하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를 것인데, 어쩌면 각자의 정의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색깔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조금 즐겁다.

– ㄱOO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개념 (사실 한 번도 이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 개념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들을 아니라고 하니 책을 읽으면서 놀란 부분들이 많았다.

– ㄱ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