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closeup photo of brown and black dog face

모임의 흐름

  • 지난 한 달에 대한 업데이트. 미술 생활을 위주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 오늘의 책과 관련한 전반적인 인상, 깨달음 공유
  • 생각할 거리 나누기
  • 발제 노트 읽기, 독서 노트 읽기

박재용의 노트

얼마전 동료들과 운영하는 공간에서, 이런 행사를 호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 접근성과 배리어프리에 관한 책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This is what we think》의 발간을 기념한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대담으로 진행된 행사였습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각 예술visual art”라는 표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조심스럽지만, ‘시각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이라는 말 대신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전시 공간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동시대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이라는 (다소 장황하게 보일 수 있는) 말로 스스로의 활동을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이 저하되는 사람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후천적인 이유 혹은 현상을 통해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지요. 실제로 책의 두 저자 가운데 한 분은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30대가 되어서야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그런 것’은 없는 겁니다.

한편, 함께 읽고 모인 오늘의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그저 미술 접근성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과 예술을 어떻게 함께 논할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책으로만 읽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 책은 결국 (우리가 대게 ‘미술’이라고 부르는) 예술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하나의 경로 또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가이드를 굳이 마다하는 시라토리씨의 모습에서, 친절을 넘어 전시와 작품을 납작하게 접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는 온갖 안내 콘텐츠가 범람하는 요즘의 상황을 생각하게 되죠.)

더불어, ‘일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을 해내기 위해’구조를 만들면서 (때로는 불가피하게 가정하는) 위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오늘의 책은 다시 한 번 생각할 계기를 던집니다. 결국, 이 질문은 예술을 감상할 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이에 대해 이번 책의 다음 구절이 작은 단서가 되어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과 만나고 편해졌다’는 말을 최근 2년 동안 여러 차례 들어왔다. 마이티도, 시 라토리 씨도, 그리고 나도 시작을 파고들면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찾아 미술관으로 도망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옭아매는 상식이나 여성, 맹인, 고등학생, 사회인의 스 테레오타입이 되라는 강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집, 학교, 직장에서 뛰 쳐나갔을 때 우연히 그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관련해서 두 가지 링크를 소개하며, 짧은 노트를 마무리합니다.

송고은의 노트

나는 현실세계의 친구들을 두고 ‘날씨 예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나의 친애하는 예술가 친구들은 ‘Kaleidoskop 만화경’ 같다고 생각한다.

날씨 예보는 그것이 적중하든 그렇지 않든 오늘을 사는데 참조가 된다.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우산 가져가!’ 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 ‘만화경들’은 간신히 붙잡고 있는 내 현실감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 안에 든 엄청난 풍경을 놓치기는 어렵다. 그들 앞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좀 더 아는 척을 하며 훈수를 둔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의 단편인 것 같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나의 예술가 친구들과는 아리오와 마이티, 시라토리 같이 무엇을 찬찬히 감상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이번 전시를 만들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그 사이에는 무슨 드라마들이 펼쳐졌는지 따위에 시간을 보낸다. 오히려 함께 미술을 감상할 때 즐거웠던 것은 적당한 인내심이 있는 나의 ‘날씨 예보’ 친구들이다. 

온갖 상징과 비하인드를 뒤로하고 정말 거기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과의 시간을 떠올렸다. 미술 감상도 어쩌면 여행 같아서 무엇을 보는 것 보다 누구와 함께하는 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 시라토리 그리고 마이티, 아리오 셋이 서 본 작품은 누구와도 같은 감상을 만들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와 전시를 만든다는 것도 비슷하다. 같은 주제를 두고도 어떤 작가와 함께 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따른다. 현학적이거나 낭만적이 차원이 아니라 정말로, ‘다른 감각’을 지닌 예술가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여러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무 mumu>(2019) 와  <스테레오 비전>(2020) 두 개의 전시는 장애가 있는 작가들과 함께 만든 전시였다. ‘내 속의 우생사상’을 발견한 때이기도 했고,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너무도 근본적인 질문들을 하게했다. 그때는 지금 보다 더 무지하고 용감했기 때문에 부딪힐 수 있었다. 다행히 그때의 경험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서 함께하기를 포기하는 일 그리고 당연시되는 무지함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것 처럼 우리는 서로 일 수 없다. 그 사이에 다름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미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정은혜 작가의 2019년 작품

함께 생각해 볼 질문들

  • 당신은 장애가 있는 사람과 (혹은 친구와) 미술관에 가본 적이 있나요? 
  • 당신의 가장 좋은 감상친구는 누가 있나요? 
  • 작품을 하나 화면에 띄워놓고, 우리 중 두어 사람의 눈을 가린 채 설명해 볼 수 있을까요?

독서 노트들

우리 클럽의 부제인 ‘솔직히 봐도 잘 모르잖아요’에서 ‘본다’는 것이 눈 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책 중간에 나온 것처럼 작품 의 본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해도 작가는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이고, 보는 방식도, 보는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지기 때문일까? 아니면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된 내용이 부제로 된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ㅂOO

고전, 현대 미술을 보는 방법이 중요한게 아니였다.

왜 그렇게 보는 방법에 집착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미술관이 너무 가고 싶다.

– OㅇO

한 작품을 10분, 15분을 본 적이 었었나. 누군가에게 내가 지금 보고 있 는 작품을 설명해주려면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 을 보고 느끼는 바를 말로, 글로 표현해본적이 얼마나 있었나 돌이켜보 니 전시 전체에 대한 감상만 짧게 남겼을 뿐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글은 남긴적이 없다. 시라토리씨가 요구했던 ‘정확한 작품 해설보다 보는 사 람이 받은 인상이나 추억’을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리고 있다.

– OㄷO

예술 작품을 보면서 나는 혹시 예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작품을 제대 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심오한 의미를 놓치고 떠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을 경험한다. 모범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일찌기 학습되어 선지 올바른 또는 정확한 이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전맹인 사람의 예술 감상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사전에 축적된 기초지식, 이론, 경험 등이 감상에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읽으며, 약간은 안도감, 자유함을 경험하였다. 사실 안다고 생각해서 놓지고 보지 못하는 것 이 많다는 것, 선이해가 없을 때 오히려 ‘눈의 해상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에 나의 예술 감상에 미래가 있다^^는!!

– ㄱOO

정작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는 작품의 정확한 해석이 아니라 친구가 설 명하는 순간의 온기와 분위기, 공감대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데 말이다. 이 책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미술공간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느냐도 말해주지만. <미술 작품은 눈으로 보는 것 이 다가 아니다>를 꼬집어주는 듯하다.

– ㄱOO

다른 사람과 함께 보는 것, 타인 속에 함께 있고 타인이 만들어내는 환 경, 그감각을 느끼는 것, 타인과 교류하며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것, 그리하여 실존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때로는 타인과 있는 것 만으로도 따뜻한 기분이 들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이 장 점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 ㄱOO

어떤 작품은 멀리서만 봐서 가까이 가서 보니 전혀 느낌이 달랐고 또 다른 작품은 가까이서 봤지만 재료까지 보이진 않았는데,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보니 나 역시 “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 OㅅO

읽는 내내 미술관에 너무 가고 싶어져서 미술관 홍보 서적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작가는 시라토리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당연히 좋은 사람이니까 이 책의 주인공이 됐을 테고… 이런 책에서 시라토리를 흉보는 내용이 있는 것도 참 이상할테지만 과도하게 훌륭하고 새로운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묘사하는 게 오히려 조금 불편하기도했다. 

– ㅂOO

현대미술? 너도나도(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솔직히 봐도 잘 모르잖아요. (중략)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왕왕 맹인이 코끼리 더듬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봉사들을 데리고 코끼리를 만지게 해보면 각자 자기가 만진 부위로 코끼리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는 고사가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중략)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본 엄정순 작가의 <코 없는 코끼리> 작품이 문득 떠오른다. 시각장애 학생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학생들이 청각, 촉각, 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재해석 해 커다란 조형물로 만든 코끼리 작품이었는데 거의 유일하게 작품을 직접 만져보며 감상할 수 있었다. 그 때 만져본 코끼리의 촉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감상한 작품이라 그런지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다. 작품을 만지면서 오히려 시각이 작품 감상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나중엔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져보았다. 색채가 사라진 상황에서 다른 감각으로만 작품을 접했을 때 왠지 그것을 만든 본질적 의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라토리 씨는 타인의 입을 통해 눈을 대신했다면 반대로 나는 눈을 감아 작품을 형상화했던 타인들의 감각을 대신 느껴보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 ㅂOO (놀러가기)
코 없는 코끼리, 엄정순. 사진 제공=두손갤러리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2D49SJPO0A

저자가 의도한 대로 맹인의 관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저자의 시선으로 맹인을 바라보다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저자까지도 관찰하게 되니 결국 미술을 본다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는게 나의 편견이구나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 제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 공간에서 느끼는 온도와 소리 그리고 들려오는 말들과 감상하는 사람들의 대화와 감정까지. 이 모든것들이 미술을 즐기기에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고 있으면서 정답이 있을거야라고 착각을 하며 즐기기 보다는 내가 틀리지 않았으면 하면서 조금이라도 힌트라도 얻길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는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 OㅅO

“눈이 보이지 않아도 시각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

감각이 전무한데도 역설적으로 감각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짜릿한 포인트를 제공했다. 그렇게 많이 들었던 스티비 원더,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피아노를 치고, 감각을 구현한다. 전맹이어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또 다른 의지 있는 주체이자, 서로 대신할 신체로 도움을 준다면 보다 풍요롭게, 음미할 수 있는 감각의 전복성을 책에서 확인했다.

– OOㅇ

대학교에 다닐 때 수화 실기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첫 수업 때 강사님은 ‘이 수업이 끝나면 여러분 주변에 농아인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보이는 만큼의 세상만 인식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라토리 씨와의 만남은 저자에게 있어 큰 행운이었으리라.

농아인은 스스로 장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끼리는 언어 전달의 불편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불편함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고. 책을 읽는 내내 시라토리가 참 특이한 인물이면서도 대단하다고 느꼈던 지점이다.

’제대로 본다‘라는 말은 무언가 정답이 있음을 내포하는 말 같아서 별로 같고, 여럿이서 함께 예술작품을 씹고 뜯고 맛보는 즐거움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대했을 때 더 많은 대답과 경험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생한 수기로서 흥미롭게 읽었다.

– OㅇO

보통은 전시회를 가면 작품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뉴욕 현대미술관인 모마에서 대화형 미술 감상법을 제창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되었다.

– ㅎ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