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이것이 새입니까?]

  • 이것이 새입니까?-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 저자: 아르노 네바슈 Arnaud Nebbache 글, 그림, 박재연 옮김
  • 출판사: 바람북스
  • 출간일: 2024년 12월 24일
  • 분류(예스24): 국내도서 > 만화/라이트노벨 > 그래픽노블

  • 트레바리 [미술아냥] 97번째 모임

고은의 노트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정확히는 현대미술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되는가?라는 질문이 요즘같은 때도 이렇게 논쟁적이고 주목을 얻을 수 있을지, 오히려 1920년대 뉴욕의 현대미술은 오늘과 달리 “시급하(고), 인기 (있는) 문제” 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실인지 아닌지가 내가 믿었던 상식과 법정에서의 판결이 다를 수 있음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를 통해 현대미술은 비로소 미국의 법정에서 당대의 예술로 공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세관을 통과하는 작품에 대해 비슷한 헤프닝이 종종 발생합니다. 저 또한 법정에서 저의 “큐레이터성”을, 제가 만든 “전시”를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어떤 가치에 대한 평가를 “법대로 하는 것”이 현실과 또 얼마만큼의 간극을 만들어 낼까요?

저 또한 저게 예술인가? 이건 왜 이렇게 나쁘고/ 좋은 가?에 대해 하루에도 수도 없는 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브랑쿠시에 대한 판결에서 다행이었던 것은 사회, 문화적 현상을 “좋고/나쁨”으로 가리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다는 점이 었습니다. 여러분의 예술관에서는 무엇을 받아 들이고, 또 어떤 것을 배제하고 있나요?

함께 살펴 볼 문장들

”1913년 아모리 전시의 성공에 충격받은 미국인들이 수입되는 외국 작품들에 대해 세금을 올리겠다고” (36)
“왜 예술이 산업과 경쟁을 해야하는 거지? (48)
“네, 다른 학교를 다닌 적은 없습니다. 독학으로 예술을 공부했어요 (51)
“노동자가 작품을 창조하고 상상할 수 있다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걸까요? (59)
“회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상의 재현과 자연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91)
“내가 여기서 만드는 건 순수한 자연이야” (99)

재용의 노트

브랑쿠시의 두 작품을 보면서 시작해보겠습니다.

먼저, <Princess X> (1916) (bronze)입니다.

제목과 달리, 다소 당혹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죠. 그런데, 이 작품, 원래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Woman Looking in a Mirror> (1909)

브랑쿠시는 이 작품을 스스로 파기했다고 알려졌습니다. <Princess X>의 제작 연도가 1916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 조각상을 당혹스런 모양으로 단순화하는데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죠. 그런데 왜 ‘거울을 바라보는 여인’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표면으로 처리된… 단순한 모양을 한 ‘공주 X’로 바뀌게 된 걸까요?

브랑쿠시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으니,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작품을 의뢰한 ‘공주 X’가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 1882~1962)라는 점을 안다면 조각상의 모양이 왜 저렇게 나오게 되었는지 어림짐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나폴레옹 1세 의 증조카딸인 마리 보나파르트는 엄청난 상속 재산을 바탕으로 많은 일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프로이트의 연구에 많은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녀가 평생 고민하고 연구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성(性) 문제였는데, 바로 본인이 그 문제를 앓고 있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이 조각상의 최종 버전에 반영된 걸까요? 역시나,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브랑쿠시의 말을 빌자면, “내 작품을 알 때까지 내 조각을 들여다보라(Look at my sculptures until you see them)” 할 수 있겠습니다. https://www.artinsociety.com/the-controversies-of-constantin-brancusi-princess-x-and-the-boundaries-of-art.html

미술사가 마짓 로웰(Margit Rowell)이 쓴 책 [Brancusi Vs. United States: The Historic Trial, 1928](1999)은 오늘 우리가 읽은 책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예술일까요? 오늘날 예술에 대한 정의는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그 무엇도 예술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법률의 시선은 좀 다릅니다. 무엇보다 돈이 오가고, 물리적 실체가 오가는 일이 개입될 때는 그저 ‘이것은 예술’이라는 취미(趣味)판단에 기댈 수 없죠. 사람이나 물건이 국경을 넘나들 때는 관세나 세금이 부과되는 법이니까요.

국가별 예술품 관세

완전 면제 국가: 미국, 영국, 한국, 홍콩
조건부 면제 국가: EU(관세 면제지만 부가가치세 적용), 캐나다(USMCA 대상국만 완전 면제)
제한적 면제 국가: 일본(일부 협정 대상국에 한함)

브랑쿠시의 <새>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은 1928년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예술 작품과 세관의 다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Haunch of Venison v. HMRC (UK, 2008-2010)

런던의 헌치 오브 베니슨 갤러리가 빌 비올라(Bill Viola)의 비디오 설치 작품과 댄 플래빈의 조명 조각을 수입했을 때, 영국 세관은 이들을 “조각품”(5% 부가가치세 적용)이 아닌 “전기 장치”(17.5% 부가가치세 적용)로 분류했습니다. 영국 부가가치세 심판소는 처음에 갤러리 측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유럽 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이 결정을 뒤집고 비올라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빛 효과”이며, 플래빈의 작품은 “조명 기구의 특성”을 가진다고 판결했습니다.

Thaler v. United States Copyright Office (US, 2023)

컴퓨터 과학자 스티븐 테일러는 그의 AI 시스템이 자율적으로 창작한 시각 예술 작품 “A Recent Entrance to Paradise”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신청했습니다. 저작권청은 이 신청을 거부했습니다.
법원은 “인간 작가성은 저작권의 기본 요건”이라며 저작권청의 결정을 확인했습니다. 이 사건은 AI가 생성한 작품이 인간의 창의적 개입 없이는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했습니다.
https://www.artforum.com/news/court-rules-against-copyright-protection-for-ai-generated-artworks-252910/

Snow v. Eaton Centre (캐나다, 1982)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는 토론토의 쇼핑몰 이튼 센터를 위해 60마리의 캐나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 <Flight Stop>을 만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쇼핑몰은 스노우의 허락 없이 기러기에 빨간 리본을 장식했고, 스노우는 리본 제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온타리오 고등법원은 스노우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튼 센터가 캐나다 저작권법에 따라 그의 도덕적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결했습니다. 법원은 리본이 “그의 자연주의적 구성의 조화를 해쳤다”는 스노우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무엇이 예술인지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골치 아픈 문제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예정입니다.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할 것이니까요.

질문들

  •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는 당신에게 정말 “새(예술품)”으로 느껴지나요?
  •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문장은?
  • 창작물이 “예술 작품”이 되는 건 대체 언제일까요? (왜 누가 만든 건 “작품”이고, 누가 만든 건 작품이 아닌가? 왜 누구는 “예술가”이고 누구는 아닌가?)

독서 노트들

지난한 재판 과정동안 브랑쿠시는 점점 정신적으로 쇠약해져갔다.
밤낮으로 새 이야기만 하고,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감에 빠져 점점 더 집착을 하게 된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런 전환점에 선봉에 서기를 원치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끝까지 버틸 수 있던 것은 지지해주는 가족과 주변인, 그리고 ‘자기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 ㅇOO


법원이 예술성을 판단하는 것이 정당한지, 미술계의 의견이 정당성을 갖는지 생각해 보았다.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 천경자의 <미인도>, 리처드 프린스의 <캐널 존> 사건은 법원의 판단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법원은 판결을 내려야 했고, 미약한 기준이라도 당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기준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 ㅇOO


새로운 예술 사조가 등장하고 정당한 예술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예술가들이 비판과 저항 속에 어려움을 겪는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는 낯선 것을 직면했을 때,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기보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은 늘 경계를 확장해고, 새로운 표현이 언어처럼 기능하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 더 넓은 감각과 가능성을 열어준다.
– OㅁO

판사가 뭔데?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미학적 지식과 예술적 경험, 혹은 예술 창작의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가진 주체의 판단이 필요하다.

예술의 정의는 결국 예술가, 미학자, 예술 비평가, 철학자와 같은 내적 권위를 가진 주체가 정의, 혹은 합의를 해야 할 문제이다.

법원은 예술적 해석에 대해, 여타 집단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전혀 지니지 않는다.

나아가, 법정에서 벌어진 일은 실제로 ‘정의’라기보다는 ‘분류’의 문제에 더 가깝다. 브랑쿠시의 작품을 예술품으로 인정한 것이, 예술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분류 체계(공산품과 예술품) 안에서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를 법적 판단을 통해 결정한 것뿐이다. 따라서 브랑쿠시 재판을 예술 개념을 재정립하는 사례로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며, 법의 기능과 예술적 정의의 근본적인 성격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OㅈO

당연히 새가 아닙니다.

이것은 새입니까? 당연히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설득할 수 없다. 이 좌절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어 아이러니하게도 재미있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의 촌극이 제공하는 웃음이 있었다.

이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계속 등장했던 파리의 아뜰리에 브랑쿠시는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우리 학교 가는 그 길목에 위치해있었다. 늘 슬쩍 슬쩍 기웃거리며 지나치기만 했지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책을 읽으며 뒤늦게 아쉬움이 들었다.

– OㅇO

이 책을 덮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게임사회>가 바로 떠올랐다. 빌 비올라, 백남준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기술의 발전과 미술에 융합됨에 따라 더 확장된 매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현대미술은 더욱 다양한 생김새를 선보이고 있다. 게임은 결국 게임일 뿐이라며, 이것을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들은 이후 이따금씩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곱씹어보곤 했다. … 패브릭 작품 중에서 캔버스에 씌우지 않은, 벽에 그대로 걸치는 설치하는 작품이 카펫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에 대한 문제로 세관에 걸린 경험이 있다. 그것이 커튼이나 카펫과 같은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상업적 판매용) 물건이 아니라 예술가가 수공업으로 제작한 단 한 피스의 예술작품이라는 점을 증빙했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 훨씬 더 자유분방하게 결합되며 사용되고 있는 작금의 상태는 먼 훗날에는 지금 2025년을 보여주는 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OㅇO

책은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예술과 실용, 예술가와 장인, 창작과 노동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품의 본질이 형태에 있는지, 작가의 의도와 상상력에 있는지, 아니면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재판 과정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특히 “노동자는 예술가와 같은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상상하지 않으니까요”라는 대사처럼, 예술의 창조성과 실용성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인상 깊었다.
– OㅎO

부록

김인규 미술교사 사건을 아시나요?

2000년 9월, 충남 서천 비인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인규 교사(당시 39세)가 자신과 부인의 나체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그는 온라인상에서 ‘naked(벌거벗은)’라는 아이디로 작품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술 작품으로서 게시된 이 사진은 일부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게 되었죠.

2001년 5월, 김인규 교사는 교장으로부터 사진 삭제 요구를 받은 지 열흘도 되지 않아 긴급 체포되었습니다(5월 17일~26일 일시 투옥).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검찰 조사를 받게 된 겁니다.

1심과 2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2005년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으며, 사건을 고등법원에 파기환송했습니다.

이 사건은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여기서도 큰 영향을 미친 건 결국 법률적 판단에 따른 분류 문제였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예술이지만, 법은 그걸 용납하지 않으니까요. 오늘의 이야기와 별개로, 한국에선 오랜 시간 국가보안업과 음란물에 대한 규정이 창작자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이거… 과거형으로 쓰는 게 맞는 거겠죠…!?)

  • 누드사진 파문이후 학교에서 수업할 때 학생들의 반응이 예전과 좀 달라졌는가.
    “훨씬 진지해지고 수업을 더 열심히 듣는다.”
  • ‘누드사진 인터넷 게재’와 관련, 사회의 시각은 찬반양론인데 학생들도 갈라진 반응을 보이지는 않던가.
    “학생들은 안 그렇다. 학생들은 오히려 나를 지지한다. 나를 일단 믿으니까. (학생들은)’우리 선생님은 미술선생님이시고 예술가이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미술시간에 내가 내 작품을 갖고 수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교육과정에 있는 범위 내에서 그와 관련된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은 더 쉽게 이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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