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깥으로: 리크릿 티라바닛과 노지의 미학
- 저자: 이유진, 리크릿 티라바닛, 최유미, 조혜수, 자카, 스미토모 후미히코, 김성은(그레이스), 박은애, 생생
- 출판사: 크로마에디션스
- 출간일: 2025년 3월 27일
- 분류(교보문고):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 예술이야기

고은의 노트
미술관 옆 퇴비 무덤이(71p), 막걸리를 함께 마시는 것이(95p), 화목난로, 그리고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99p) 예술의 일부, 아니 혹은 그 자체일 수 있을까요?
흔히 뒤샹의 ‘샘’을 두고 예술가들의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이라는 문장은 미술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도시 전설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만 널리 퍼진.) 헛된 고고함과 대중의 우매함을 자조하곤 합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미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엉뚱한 일들을 꾸밉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진보란 무엇인가요?’ 따위의 질문을 한다던가 – 티노 세갈(Tino Sehgal), 《이런 모임 These associations》; 오페라 하우스 내부에 1,000그루의 나무를 심고 그 사이를 거닐게 한다던가 –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A Forest of Lines》 같은 일들입니다.
말없이 조용한 ‘작품’을 보다가 총총총 집에 가고 싶었던 우리들에게, 이들은 꽤나 큰 당혹감을 줍니다. 그 중심에 오늘 책에 등장하는 작가, 리크릿이 있습니다. 그에게 미술 작품의 진수는 단상이나 벽에 고정된 작품을 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여러 활동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공명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차를 나누고 대화하는 모든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날 그 어떤 아름다운 시각 작품보다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하는 듯합니다.
이를 두고 여러분은 기꺼이 그의 부엌에 발을 들여놓을 의향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실까요? 아마도 보통은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그 부엌 한켠에 걸터앉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불행히도 앞으로 영원히 만나게 될)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함께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재용의 노트
지금 이 순간 미술이 처한 근본적인 아포리아(aporia).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 막다른 길. 컨템포러리 아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멈출 수 없는 생각입니다. [바깥으로: 리크릿 티라바닛과 노지의 미학]을 읽으면서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도대체 이게 왜 예술이야?’에 대해 저도 종종 같은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함정입니다. ‘왜 예술이야?’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짜 예술’과 ‘가짜 예술’이 구별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그 경계를 정하는 걸까요? 리크릿 티라바닛이 갤러리에서 쌀을 끓여주는 건 예술이고, 길거리 노점에서 똑같이 쌀을 끓여주는 건 예술이 아닌 이유는 뭘까요?
장소가 중요한가요? 작가라는 이름표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뭔가 마법이 일어나는 걸까요? 리크릿 티라바닛도 이 모순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관계의 미학’, ‘공동체’, ‘무료 나눔’을 추구하면서도 결국 화이트큐브 안에서 상품이 되는 역설 말이에요.
그의 작업은 미술관 밖 ‘진짜 세상’에서의 관계를 꿈꾸지만, 정작 그 꿈이 의미를 갖는 곳은 미술관 안입니다. 태국의 길거리에서 쌀을 나눠주는 것과 뉴욕 MoMA에서 쌀을 나눠주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합니다. 결국 ‘제도’가 그 마법을 부리거든요.
미술관, 갤러리, 비평가, 컬렉터, 큐레이터… 이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가 평범한 행위를 ‘예술’로 변환시키는 거대한 장치입니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끝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는 분석은 예술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무리 급진적인 예술도 결국 시장의 논리에 흡수되어 버리니까요.
이건 발터 벤야민이 거의 100년 전에 예견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는 예술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상품이 되는 순간을 경고했어요. 리크릿 티라바닛의 ‘무료 쌀’에는 분명 따뜻한 아우라가 있지만, 그것이 갤러리에 전시되고 컬렉션에 포함되는 순간…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도르노가 말했던 ‘부정의 변증법’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런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견디라’고 말합니다. 모순을 통해 사유하고, 모순과 함께 실천하라고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체념하고 포기하라는 걸까요? 아니면 다른 종류의 희망을 제시하는 걸까요?
리크릿 티라바닛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의 작업이 상품이 되는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바로 그 모순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시스템의 포획 능력을 가시화하는 강력한 비판이 됩니다. 모순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죠. 말은 쉽지만, 실제로 구현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모순을 안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바깥으로”라는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이미 역설적입니다. 진짜 바깥이 있다면 굳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는 모두 안에서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고민을 반복할 때마다 계속해서 돌아오게 되는 Tino Sehgal의 작품, [This is so contemporary](2004)
수집된 질문들
함께 대화하는 시간: 6월 1일 오후 4시 30분부터(약 50분 가량 줌 미팅)
책을 읽으며 궁금한 점이나 저자와 더 나눠보고 싶은 주제가있으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중간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진 님만의 최소한의 규칙이 있을까요? (보강을 하자면, 공동체 작업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권력 불균형 또한 작품의 일부가 될까요?)
- 도시 한복판에서도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관계의 미학’이 ‘관계 소진- 자본시장에서의 상품’으로 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 저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검은 퇴비’의 개념과 ‘삶은 곧 예술’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 어떤 결과물이 남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순간’이 예술이 될 때, 기억을 어떻게 아카이빙 하면 좋을까요?
-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관람객을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끌어들이는 스타일이 편안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뉴욕유학 시절과 제주살이의 라이프 스타일이 굉장히 다른데 이로 인하여 작품세계관이나 추구하는 방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특별히 참여 전시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